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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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스멀스멀 고개를 내미는 기사 중에 이런 류의 제목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Gen Z들에게 독서는 섹시한 행위로 치부된다. 그들에게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힙한 행동이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새로운 용어들 역시 쏟아지기 시작했죠. '텍스트힙', '책멍', '독파민(독서+도파민)' 같은 말들도 이젠 그리 신기하고 낯선 단어들이 아니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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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관련한 책을 써서인지 한 매체로부터 이런 현상에 대해 짧게나마 제 생각을 소개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청주신 분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정중히 거절했죠. 아쉽게도 기사를 쓰는 분께서 이미 자기만의 답을 내리고 계신 느낌이 물씬 나더라고요. 그리고 그에 맞는 의견을 끼워놓을 요량으로 몇몇의 목소리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죠. 그 레이더에 아마 제가 걸려들었을 수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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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독서가 이른바 새로운 행위와 문화로 간주되는 것도, 책을 둘러싼 조금은 간질거리는 유행어들이 탄생하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책을 좋아하고, 늘 책과 관련한 콘텐츠를 다루고 또 소개하는 저로서도 딱히 책에 관한 엄청난 철학이나 가치관을 가진 것은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그저 책 읽는 행위가 참 즐겁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작은 생각의 조각들을 주워 제가 하는 일들에 조금씩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계속 읽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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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에 쏟아지는 기사들은 마치 '새로운 세대들은 그동안 책 따위엔 관심이 없었는데 복고 패션의 유행이나 클래식 카를 찾는 취향처럼 책 읽는 행위를 특별한 멋으로 생각하고 있다'로만 해석하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흡사 양팔과 양다리를 모두 꼰 채로 '우리 세대가 하는 독서와 너희 세대가 하는 독서는 다르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다니 기특하구먼'이라는 시선으로 내려보는 느낌이랄까요. 개인적 선호 아래 각자의 즐거움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집단적 특성이란 상자에 욱여넣는 모습은 40대를 시작한 저에게도 결코 유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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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파민'이라는 단어도 친한 동생에게서 처음 들은 단어였습니다. 독서모임을 위해 발제문을 작성하던 중 주위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책을 좋아하는 동생에게 이런저런 의견을 물었는데 대뜸 '형 근데 독파민이라는 말 알아요?'라는 질문이 날아든 것이죠. 그리고 이어진 동생의 말에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이 담겨있었습니다.
"참 웃긴 게... 사람들은 늘 분모에도 공통점을 두고 분자에도 공통점을 둬요. 그러니까 A라는 공통점을 가진 세대들에서 B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또 C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식인 거죠. 그에 들어맞지 않는 것도 너무 많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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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견에는 저도 정말 크게 동의가 되더라고요. 기사에서처럼 숏츠에 중독된 Gen Z들이 잠시 뇌를 시킬 목적으로 책을 읽는다고 해석하거나, 이제 숏츠조차 새로울 게 없는 상황에서 텍스트로만 된 책이 새로운 도파민이라는 둥의 말은 제가 봐도 비약이 너무 심한 것 같았거든요. 책 읽는 행위를 섹시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찬성이고, 텍스트를 힙하다고 칭하는 것도 찬성이지만 그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을 뭉뚱그려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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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고개를 드는 이유는 한 가지 우려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처럼 트렌드에 민감한 환경이라면 '책을 읽는 게 유행이다'라고 인식되는 순간 뜨겁게 그 유행이 달아오르다가 또 어느 순간 '텍스트힙, 독파민, 책멍 이런 단어 그만 좀...'이라는 분위기와 함께 차갑게 식어버릴지도 모르거든요. 뭐 본인 행동의 근간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도 인간의 자유인데, '쟤는 보여주려고 저러나 봐'라는 시선을 받는 순간 우리 사회에서는 또 손가락질이 시작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리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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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디자이너라 불리었던 '알렉산더 맥퀸'은 자신의 패션에 특정한 별칭을 붙이는 기자들과 자주 언쟁을 벌였습니다. '트렌드를 이끄는 방법 중 하나는 특정한 것이 트렌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그의 기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인 셈이죠.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빈약한 근거와 적당한 선입견과 손쉬운 분류와 약간의 우월감이 보태져 생긴 '트렌드'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 본질 근처에 가보기도 전에 재빨리 결론을 지어 다시 돌려보내버리고 마니까요. 한편으로는 알렉산더 맥퀸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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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게 인터뷰를 요청한 그 기자님도 이런 말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책 읽는 행위는 우리 세대에서 힙한 행위로 자리 잡았고, 오늘날처럼 휘발성이 강한 콘텐츠 사이에서 제대로, 또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콘텐츠다'라고 말이죠.
그치만 저는 숏츠도 재밌습니다... 책에는 책이 주는 재미가 있고, 시대의 플랫폼에는 또 그만의 재미가 담겨있죠. 각자가 선호하는 것을 통해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만이고, 이왕이면 그 루트가 다양할 때 더 유리하다는 정도가 제 입장이지 독서에 필요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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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이건 제가 책을 사랑해서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는 건들지 마라'라는 말처럼 저는 특정한 대상을 하늘 높이 띄워줬다가 금세 나 몰라라 하는 그 마인드가 그리 달갑지 않거든요.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은 늘 책을 읽고 있고, 새롭게 책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환영이고, 잠시 책을 떠나있는 사람도 마냥 아쉽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아주 긴 호흡의 마음을 먹는다면 작금의 현상이 딱히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니까요, 그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각자의 이유로 존중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니 독서와 관련한 현상은 많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지나가게끔 하는 건 어떨까요... 그들이 책 읽는데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