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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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가면서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게 되는 질문들은 대개 새로운 질문들이라기보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근원적인'이라는 진지한 단어를 쓰긴 했지만 실상은 뭐 그리 대단한 질문들이라고 보긴 또 어렵죠.
너무 어이없게도 '사람은 왜 이기적일까?', '왜 집중력은 20-30분을 넘기기 어려울까?', '어린 시절에 한 것들은 찰나의 순간마저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어제 일은 왜 먼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까?'이런 것들에 가깝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책을 고를 때도 이색적인 주제를 탐닉한다기 보다 삶의 궤적이 한 꺼풀식 더해짐에 따라 덩달아 늘어나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방향의 책들을 더 많이 선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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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모임에서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세상엔 재미난 일들이 정말 많아 보이는데 왜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예전 같으면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라'며 핀잔을 줬을 친구들도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었는지 다 같이 그 주제에 나름의 집중을 해주는 게 참 기특하더라고요. 누군가는 '원래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일은 재미없다'고 말했고 또 다른 친구는 '그 사람들도 네가 하는 일은 재밌어 보이고 자기가 하는 일은 재미없다고 생각할 거야'라며 위로가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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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도 같은 고민을 해봤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제가 하는 일이 막 그렇게 재미가 없다고 느끼지도 않고 또 남이 하는 일에 이유 없는 부러움을 보내본 적도 없긴 하지만 종종 '뭐 더 재미있는 일 없을까' 혹은 '좀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같은 철든 뽀로로의 심정으로 내 일을 바라보게 될 때가 있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면 대부분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자'라는 체념 반 응원 반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보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제대로 고민을 해 볼 기회가 생긴 셈이죠. 그래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라도 내 나름의 작은 답을 찾고 싶었던 마음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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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그 질문에 대한 작은 단서를 '연속성'에서 찾았습니다.
일을 구분하는 기준과 단위는 무수히 많겠지만 저는 종종 '연속적인 일'과 '비연속적인 일'로 일의 개념을 나눌 때가 많습니다. 즉 내가 주된 업으로, 매일매일, 일정한 결과 이상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들은 당연히 '연속적인 일'에 해당하겠죠. 반대로 주기가 일정하지 않거나 목표나 과제가 매번 달라지거나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비연속적인 일'에 포함될 겁니다. 저에게 비유해보자면 회사를 다니며 하는 일은 연속적인 일들이고 글을 쓰며 책을 내는 일은 비연속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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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회사를 다니며 꾸준히 글을 쓰는 게 힘들지 않냐고 하지만 저에겐 오히려 훨씬 생산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때가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삶이 주는 버거움을 비연속적인 일들이 상쇄해 주는 효과가 큰 셈인 거죠. 이런 비유가 좀 어이없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회사 일을 하다가 좀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거나 혹은 스스로 흥미를 크게 붙이지 못하는 업무를 해야 할 때면 주말에 온전한 시간을 빌어 제가 원하는 글을 쓰고 있는 저를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 왠지 눈앞의 연속적인 일도 조금은 다시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으니 지금은 꾹 참고 일단 해보자'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이 일도 뭔가 새로운 과제처럼, 새롭게 쓰는 글 한 편처럼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럼 그동안 당연시하게 여기던 것들을 좀 끊어내고 전에 없던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니 연속적인 일을 비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번아웃을 피할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이기도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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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일상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취미나 탈출구를 만들라는 말과는 또 전혀 다른 얘깁니다. 사실 제겐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도 엄연한 '일'이거든요. 새 책을 낼 때마다 명확한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어떤 관점으로 내 글을 봐줄까를 고민하다 보면 회사일 못지않게 고민의 강도가 높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매 순간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늘 빵빠레를 울리며 하는 작업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제게 큰 리프레시를 가져다주는 주요한 요인은 주말에 글을 쓰다 보면 주중에 해야 하는 업무들에 영감을 주는 포인트를 발견할 때가 있고, 거꾸로 주중에 하는 업무들 사이로 좋은 글감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게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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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저는 연속적인 일이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면 비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중간중간 끼워 넣어보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사람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라는 게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목을 조를 정도로 힘들어서 문제인 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은 좀 시시하거나 재미없어 보이고 남들이 하는 일은 엄청 의미 있고 흥미로워 보이는 게 문제인 거니까요. 그 부러운 지점을 내 삶으로 끌고 들어와서 현실과 이상을 살짝씩 넘나드는 삶을 살아보자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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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부터 스스로 달라진 가장 큰 습관 중 하나도 연속적인 일에 지치지 않도록 그 중간중간 '끊어내는 타이밍'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일에 집중을 못 하는 사람도 싫어하지만 일에 매몰되어 본인을 옥죄는 사람을 더 싫어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제 기준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이란 일을 입에 달고 다니며 늘 예민함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업무의 한 챕터가 끝나면 스스로 그 지점을 끊어낼 줄 알고 동시에 새로운 챕터로 유연하게 진입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포츠 경기로 치자면 이번 이닝이나 라운드를 잘 마무리 짓고 넥스트를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하는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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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박찬욱 감독이 일에 관해 남긴 말인데요, 시나리오를 쓰다가 막히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다가 머리가 복잡해지면 기존의 시나리오를 각색합니다. 그리고 각색하는 게 좀 지루해지면 새로운 시나리오를 씁니다. 본래 얄팍한 인간이라 스스로에게 미끼를 주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조삼모사 한 삶의 연속이죠.'라고 대답한 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연속적인 삶' 속 '비연속적인 것들'을 끼워 넣는 인생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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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물고 늘어져라'라는 말보다 '싹둑 끊어내라'는 말이 더 매력적으로 들린 이유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집요하게 고민해서 최상의 완성도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지치지 않는 상태로 계속 관리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열심히 살아라'는 말 역시 '일상을 계속 매력적으로 관리하라'라고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걸 의지와 마음가짐의 영역으로 넘기면 그것만큼 힘든 것도 없으니까요. 가끔은 내 삶이, 내 눈에 더 좋아 보일 수 있는 여러 치팅 요소들을 만들며 사는 게 진짜 재밌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