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음악 - 아론 코플랜드 Aaron Copland
코프랜드는 1930년대에 들어 두 갈래의 시대의 흐름을 관찰했습니다.
첫 째는 “음악적 언어를 단순화시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대중과 접촉하는 것”이었습니다.
코플랜드는 이 시류에 따라 자신의 음악을 단순화하여 더 많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려 노력합니다.
이 시류라는 것은 당시 현대음악의 난해함으로 대중과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음악의 예술적 목적뿐만 아니라 실용적 목적을 추구하자는 "실용음악" Gebrauchsmusik ("music for use”) 의 움직임입니다.
독일에서 시작한 이 움직임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던 후기 낭만파의 반동으로,
1) 학생이나 아마추어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음악.
2)연극, 영화, 라디오 등등에 부수적으로도 쓰여 더 대중적이고 실용적으로 쓸 수 있있는 음악.
말 그대로 "실용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 움직임이 등장한 것은 1930년입니다. 시기적으로 대공황의 시작이죠. 대공황의 시대에 많은 청중들은 우울하고 진지한 음악을 거부했고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대음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가 예술가들이 예술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위한 예술인가?
한 인터뷰에서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악을 듣는 전반적인 새 청중들은 라디오와 축음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들을 무시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계속 곡을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말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노력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코플랜드는 미국의 실용음악(American Gebrauchsmusik)을 만들어나갑니다. 지금은 보편화된 ‘영화음악’이라는 장르도 사실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된 장르입니다.
어쩌면 아론 코플랜드와 이 시기의 예술이 대중과 소통하기를 바랐던 작곡가들이 없었다면 지금 할리우드의 영화음악도 없었을 것입니다.
코플랜드는 피아노 곡과 오페라 등을 통해서 젊은 청중들과 소통하기 위한 미국의 실용음악을 작곡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 1936년 대표곡 중 하나인 <엘 살롱 멕시코 El Salón México>가 탄생합니다.
그가 멕시코에서 방문했던 가장 대중적인 무도회장인 살롱 멕시코 Salón México에서 영감을 받아 멕시코의 전통 음악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관광객의 시점에서의 멕시코를 묘사합니다.
엘 살롱 멕시코의 성공을 시작으로 코플랜드는 발레음악도 만들기 시작합니다. <빌리 더 키드 Billy the Kid>라는 곡에서 그는 미국의 카우보이 노래를 멜로디로 차용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담아냅니다.
그 후 <로데오 Rodeo>, <아팔라치안의 봄 Appalachian Spring>등의 발레곡을 발표하는데, 특히 당시 아메리칸 스타일의 현대무용을 만들어나가던 마사 그라함 Martha Graham의 의뢰로 만든 아팔라치안의 봄은 미국 이민자들의 초기 정착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1944년에 발표되어 그 이듬해 코플랜드는 이 곡으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는 퓰리처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1940년대에는 다수의 영화음악도 작곡하는데, 1948년 그가 음악에 참여한 <The Heiress> -한국에서는‘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네요-로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당시 일각에서는 코플랜드의 이런 대중적 소통 시도를 비난하기도 했는데요, 그런 비난에 대한 코플랜드는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The composer who is frightened of losing his artistic integrity through contact with a mass audience is no longer aware of the meaning of the word ‘art’."
“ 대중과의 소통으로 자신의 예술가적 진정성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작곡가들은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코플랜드의 미국 민족주의적 성격이 잘 드러나지만, 그의 가장 대표적이자 미국을 위한 음악의 정점은 개인적으로 1942년 발표한 <링컨의 초상 Lincoln Potrait>이라는 곡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민족주의적 음악을 선보이던 코플랜드에게 '저명한 미국인'을 묘사하는 곡을 써달라는 의뢰가 들어옵니다. 이에 코플랜드는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하며 미국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Abraham Lincoln을 모티브로 그가 생전에 썼던 편지와 연설 등을 분석하여 그를 묘사하는 글과 그가 연설한 내용들을 내레이션으로 담아낸 교향곡입니다.
나레이션은
국민 여러분, 우리는 역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Fellow citizens, we cannot escape history.
라는 1862년 링컨의 의회 연설로 시작하여,
하느님의 가호 속에서 우리나라는 새롭게 보장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우리나라는 국민의 정부이면서, 국민에 의한 정부이면서,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결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링컨의 명연설로 알려진 1983년 게티스버그 연설까지 담아냈습니다.
아마 코플랜드는 대도시의 유대인 출신 이민자 미국인과 중부 어딘가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미국인이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링컨 대통령을 통한 미국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미국인에게 애국심이란 우리처럼 조국에 대한 충성의 개념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 그리고 기회의 균등이 근간이되는 미국 헌법과 민주적 정치제도를 사수하여 후손에 넘겨주어야한다는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던데 코플랜드의 <링컨의 초상>이 그런 애국관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사실 이런 행보로 코플랜드는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적극적 정치활동에 개입한 적은 없지만, 좌파적 성향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950년대 초반에는 “매카시즘”이란 말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었던 반공주의 주창자 존셉 매카시에 의해 공산주의 혐의자 명단에 올라 반미행위특별 조사위원회에 소환되기도 했었습니다.
1950년, 코플랜드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로마로 떠납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그는 대중적인 곡을 작곡하던 이전과 확연히 다르게 12음 기법을 이용한 아방가르드한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일각에서는 그의 새로운 행보에 실망을 하기도 했다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나이가 들었음에도 꾸준히 새로운 것을 노력했던 후기의 삶이 멋지고, 대공황이 닥친 사회에 예술가로서 일조하려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미국의 음악의 정체성이 그가 동시대의 선구자 다운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