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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리홍 Jan 05. 2018

몬드리안의 그림이 음악으로 표현된다면? 1

현재와 영원의 고군분투 -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 Arvo Pärt 음악

Arvo Pärt

아르보 패르트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넘어서서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 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을 가진 현존하는 작곡가입니다.


그의 음악을 소개할 때 " Creative Silence 창조적인 고요함"라는 말로 설명되어지곤 합니다.


개인적으로 패르트의 음악은 네덜란드 출신의 추상화의 선구자인 몬드리안의 그림과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몬드리안 그림의 목표가 이 세계의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적인 구조를 파악해 드러내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핵심요소 만을 간단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던데, 아마 패르트의 음악이 몬드리안의 추상화와 이념을 같이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한 몇 개의 재료만 가지고 역동적이지 않아 보이나 어떤 역동적 에너지를 가진 몬드리안이 패르트의 음악과 닮았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회색 나무>, 1912


간단히 현대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20세기에 들어 모든 예술이 그렇듯 클래식 음악도 전통적인 구조를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의 시대에 들어섭니다. 이러한 흐름은 대체로 구성음의 관계로 형성되는 (장조, 단조) 조성음악을 벗어나 모든 구성음을 동등하게 보는 무조음악, 음렬주의 등으로 나타납니다.


‘아방가르드 하다.’고 표현되는 이런 현대 음악들은 대부분 대중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죠. 그런 이유로 아마 현대음악은 단순히 ‘그냥 너무 어려운 음악’으로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아방가르드하다, 전위적이다 하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아방가르드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어떤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술에서 늘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새로운 스타일을 찾는 부류와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적 속성을 가진 부류가 등장하게 되지요.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은 후자에 속합니다.




사실 음악의 시작부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장조, 단조로 나누어지는 조성이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음악이라는 것은 대부분 교회에서 쓰이기 위한 교회음악이었고, 그 음악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장, 단조로 나뉘어지는 조성의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교회조성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지금의 메이저, 마이너로 나뉘는 조성 개념은 바로크 시대의 ‘바흐’의 등장으로 나타난 것이죠.


바흐 이후 고전, 낭만 시대를 거치면서도 급진적이라 평가되는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들도 조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낭만시대 후기에 들어서 조금씩 조성의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다 20 세기 초, 현대음악의 아버지 격이라 할 수 있는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의 등장으로 바흐 이후 300여 년 만에 조성의 틀을 벗어난 음악을 탄생시킵니다.


조성음악에서는 한 조성 안에 특정 중심음이 존재하고 그 중심음과 다른 음들의 관계에 우선순위가 정해져서 조성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것인데, 쇤베르크는 이 조성 내의 음들의 관계가 모두 동등하여 특정 중심음이 존재하지 않는 ‘무조음악’(조가 없다는 의미의 ‘없을 무’ 입니다)을 선보이며 하나의 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전에도 조성의 틀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이라는 틀 안에서 ‘12음 기법’, ‘음렬 기법’등의 이론을 확립하며 새로운 음악이 등장하게 됩니다.


쓰고 나니 간단하지 않은 이야기였네요....

근대음악사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해두고, 오늘 소개하려는 아르보 패르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르보 패르트는 1935년 북유럽의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났고, 성장과정에서 당시 소련이라 불리던 소비에트 공화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예술 분야도 정부의 감시 아래 자유롭지 못했다고 합니다.


1960년, 패르트는 에스토니아에서 처음으로 12음 기법을 사용한 곡(Nekrolog 추도사)을 작곡하게 되는데, 그 당시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의 쇄국정책을 하던 에스토니아 사회에서 ‘아방가르드 브르주아 음악’이라는 맹렬한 비난을 받으며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이후 사회에서 주시 받는 작곡가가 되었고 심지어 1968년에 발표한 곡 (Credo 사도신경)을 처음 연주한 에스토니아 필하모닉 직원들이 해고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후에 정치적 압력에 대한 스트레스로 이민 신청을 하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1970년 대의 패르트는 사회적 영향으로 받았던 충격과 스트레스로 한동안 작곡 활동을 멈추었는데 그 즈음 우연히 서점에서 그레고리안 성가(천주교에서 불리우는 무반주의 노래 성가)를 듣게 되며 작곡가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그때의 경험을 새로운 세계로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며, 이 세상이 얼마나 깊고 깨끗한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In one moment it was clear how much deeper and more pure is this world.”




그 후 깊은 내면의 것과 영혼적인 것을 찾아 나서며 종교에 심취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세 음악과 르네상스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러시안 정교로 개종을 하게 됩니다.

그 시기에 자신이 사용하고 있던 음악적 도구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적 도구를 찾아 나섭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처럼 논리적인 시스템이면서 그의 음악적 진화를 표현할 수 있는 것.


The small steps of tolerance to the world.

즉, 작은 움직임이면서 큰 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끝에 그가 찾아낸 방식이 틴티나불리 Tintinnabuli 입니다.


아르보 패르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Spiegel im Spiegel(거울 속의 거울)" 피아노와 바이올린 버전입니다.



틴티나불리라는 그의 작곡 기법에 대한 설명은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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