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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15. 2023

161025-07

카페에서 말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데시벨


방송기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지난 7년 동안 H는 나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초반에는 수입이 들쭉날쭉했고 많지도 않았지만 3년 차부터는 개발원에서도 입지를 갖췄고 번역작업에도 요령이 생겼으며, 카페에서 작업을 시작한 뒤로는 월수입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H가 중학교 때 파리특파원을 보고 방송기자를 꿈꿨던 것은 6살 이후 병원 침대에 누워만 있는 아빠와 그런 아빠 옆에서 간호를 했던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기자가 되면 세상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방송기자로서는 아니지만 번역가로서 H도 충분히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보통 일요일은 번역이 밀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다. 그런 날은 당일치기로 전국의 명소를 여행한다. 그리고 1년 중 가장 더운 때와 가장 추운 때 보름 씩 총 한 달은 해외를 여행한다. 더운 때는 보다 시원한 곳으로 추운 때는 보다 따뜻한 곳으로. 그 주 일요일에는 단풍이 절정이라고 해서 북한산을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뒷자리에 앉아 카페에서 말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데시벨로 프랑스어를 주고받으며 엄마와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그들 때문에 여전히 13장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일요일에 집에서 겨우겨우 13장 번역을 마치고 나니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개발원에 메일을 보내려고 메일함을 열어보니 다음 주 번역해야 할 원고가 이미 와있었다. 일상의 아주 작은 변화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을까?


번역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침대에 누워만 있던 아빠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아질 기미가 없는 아빠를 매일매일 간호하는 엄마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아마도 일요일에 쉬면서 좋은 공기를 마시거나 좋은 풍경을 보거나 색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계속 번역 작업을 해서 그런 것일까. 내일부터 또 하루에 어김없이 10장씩 번역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지겹게 느껴졌다. 이만하면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번역가가 세상에서 제일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밀려왔다. 매일 10장이 부담스럽다면 양을 줄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앞으로 단 1장도 번역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다.


언제까지나 남들이 쓴 글을 번역하는 일만을 할 수는 없다 싶었다. 그건 마치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전달해 주는 대변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가던 카페, 늘 앉던 자리, 늘 하던 일에 예고 없이 찾아든 프랑스 남녀의 카페에서 말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데시벨로 인해 H는 다시 7년 만에 그동안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빨리 벗어날지는 모르지만 침대에 누워만 있다 죽은 아빠, 아빠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일 악몽에 시달린 엄마에 비하면 더 나은 인생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개발원에서 온 메일을 과감히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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