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우히어 Feb 18. 2024

돌아가고 싶다가도 머물고 싶어지는

호주여행 9일 차



지금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호주 골드코스트의 고급 리조트에 있다.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다. 어딘지 모르게 서로 특히 나와 남편은 불편한 상태이다. 누구 하나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인천에서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고 온 지 9일째인 오늘이다. 인천에서 시드니까지 10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시드니 도심에서 3박, 달링하버에서 1박 후 호주 국내선을 타고 브리즈번으로 와서 2박 후 어제 골드코스트의 마지막 숙소로 왔다. 여기서 어제 포함 3박을 한 후, 화요일 아침에 다시 비행기를 10시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꼬박 이틀의 여정이 더 남았는데, 오늘 낮에 어딘지 심상치 않은 무거운 기운이 우리를 둘러싼 느낌이었다.


재작년에 딸과 나는 발리 한 달 살이를 했었지만, 세 식구가 자는 시간 포함 온전히 하루 24시간을 함께 하는 여정은 이번이 가장 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여행 후반부여서 아무래도 다들 지치기도 한 탓이겠지만, 며칠 전에도 살짝 위기가 왔었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갔었는데, 오늘 다시 한번 더 위기가 찾아왔다.


Breakfast in cheraton grand resort in Goldcoast


조식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의논해 보았는데, 나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골드코스트 해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스카이포인트를 가고 싶었고, 남편과 딸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물놀이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니 나는 전망대를 다녀오고 두 사람은 어제 오는 길에 보았던 빠지를 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내 나름대로는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남편도 동의했는데, 오전에 수영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온 남편이 티를 안내지만 티가 팍팍 나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이제 정말 연애 기간 포함 20년을 봐온 사람이기에 잠깐의 표정이나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지금 어딘가에 무엇 때문에 아니면 나에게 짜증이나 불만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부부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 방법이 다르겠지만, 우리는 보통 2가지인 것 같다. 주로 내가 가끔 남편이 술을 먹고 술김에 좀 화를 내거나 아니면 주저리주저리 해서 풀거나, 아니면 각자 조금 떨어져서 기분을 정리할 시간을 갖거나.


적도 너머 타지에서 대낮부터 꽐라가 될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았기에 어차피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으니 그 시간 동안 풀리기를 바라며 나는 전망대에 오르고 남편과 딸은 빠지로 향했다.    



나는 남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은 척한다. 동정받고 싶지 않으니까. 행복하고 싶고, 좋은 삶을 살고 싶으니까. 나는 슬프지 않고 싶다. 아니, 내가 슬퍼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슬프고 싶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ㅡ <오늘 너무 슬픔>, 멀리사 브로더


사실 내가 조금만 더 의존적이거나 소위 말하는 여성적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남편에게 징징대거나 아양을 떨거나 아니면 잔소리를 해서 기분을 풀든 대판 싸우든 그런 상황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해서 말 그대로 이런 상황에 대해 남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은 척을 의연한 척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대처방법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바꾸기가 쉽지 않기는 하다.   


Skypoint in Goldcoast, Australia


그렇게 나는 홀로 77층 전망대에 올라 골드코스트를 내려다보고 인증샷을 몇 개 건진 후,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한 시간 거리를 걸어 리조트로 돌아왔다. 반 정도 왔을 때부터는 신발을 벗고 해변의 모래사장을 밟으며 가끔 쎈 파도에 밀려오는 바닷물에 발도 담궈가며 지는 해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도 찍어가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바다 때문에 나는 평화로운 중에도 불안증에 시달린다. 달은 나를 흠잡고 있을 게 뻔하다. 개들은 진실을 안다. 아기들은 내 속내를 꿰뚫어 본다. 자연적인 것, 순수한 것은 다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이 나를 관찰하고 평가한다. ㅡ <오늘 너무 슬픔>, 멀리사 브로더


나는 땅을 밟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파도 소리를 들으며,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의 템포로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한편,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물놀이를 마친 남편이 계속 짜증을 내면 나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닌 나는 분명히 남편의 짜증에 냉정하게 반응을 할 테고 그럼 남은 여행 기간이 매우 불편해질 텐데.



평화로운 중에도 불안증에 시달리며 숙소 근처로 와서 잠시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른 후 방으로 들어오니 남편이 먼저 씻고 있고 딸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어땠어? 물어보니 엄청 재밌었어~하는 걸 보니 그래도 물놀이는 나쁘지 않았나 보다.


씻고 나온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땠어?

응~재밌었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어느 정도는 누그러진 것이다. 자기도 생각이 있다면, 뭐 그래야지 어쩌겠는가. 아직 우리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50시간을 더 붙어있어야 하는데.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상보다 드라마틱한 상황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드라마틱한 상황에서는 세상이 내 불안에 맞장구쳐 주니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면 평범한 일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꾸게 된다. ㅡ <오늘 너무 슬픔>, 멀리사 브로더



요즘 들어 내가 어느 정도 수면장애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는 외할머니-엄마로 이어지는 유전적인 영향뿐 아니라 분명히 심리적인 요인도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우울감이나 슬픔, 분노 또는 변태적인 생각들을 싸잡아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평범한 일상보다 드라마틱한 상황을 추구하는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나에게 드라마틱한 상황이란 바로 (해외) 여행이다.



1년에 두어 번 해외를 나오는 것으로 나는 주변인들에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코스프레를 하고, 나 자신에게도 만족스러운 삶을 잘 살고 있다는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 해도 이 코스프레를 그만둘 수는 없다. 이 드라마틱한 상황마저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열흘 남은 2023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