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 이야기
제가 근무하고 있는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에는 다양한 개발도상국 출신의 동료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EBRD의 아시아 네트워크 (Asian Network)의 멤버로 활동하며 하버드 로스쿨 졸업 후 EBRD의 무역금융부서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키르기즈스탄 출신의 아이자다 마라트 키지 (Aizada Marat kyzy)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키르기즈스탄에서 잘 알려진 화제의 인물이기도 한 아이자다의 포기를 모르는 당찬 인생 이야기, 이제 시작됩니다.
1) 성장 배경을 소개 부탁합니다.
아이자다: 저는 1남 4녀 중 차녀로 이스쿨 (Issyk-Kul)라는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이스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중 하나인 이스쿨 호수로 유명한 곳이에요. 저는 키르기즈스탄의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는데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자유 시간에는 자연에서 형제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어린 기억이 있어요.
아이자다가 태어나고 자란 이셋쿠 지역의 이셋쿠 호수.
제가 만 3살이었던 1991년 8월 31일 키르기즈스탄이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했어요. 그 이후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전향되는 과정에서 기존에 정부에서 운영되었던 공장이나 일자리가 사라지고 물가가 치솟아 실업률이 인구의 50%이상에 달하는 등 경제 사정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당시 양을 관리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키르기즈스탄인은 유목민족이랍니다) 실직하신 후 약 3년간 여러 곳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셨어요. 당시 집에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직업이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했던 기억이 있어요. 다행히 아버지는 1994년부터 경찰직을 맡게 되셔서 집안 경제가 서서히 나아졌지만 수입이 많은 편은 아니셨어요. 저희는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집마당에 감자, 토마토 등의 채소를 키웠고 어머니는 매일 제게 채소에 물을 주는 일을 맡기셨는데 어린 마음에 정말 귀찮고 싫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나마 저희 식구가 음식을 자급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2) 고등학교 시절의 미국 유학 경험에 대해 궁금합니다.
저희 나라에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다양한 티비 채널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미국 영화, 드라마, 팝음악 등을 접하게 되었어요. 티비 속의 미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자유롭고 풍요로워 보였기 때문에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젠가 꼭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영어 수업을 듣는 것 이외에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2살 위인 언니와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 가사를 들리는 대로 받아 적고 함께 사전으로 단어 뜻을 찾아본다거나 매일 사전에서 영단어 50개씩을 외우고 서로 체크를 해주는 식이었지요. 그리고 길을 가다가 외국인이 보이면 영어 연습을 위해 항상 말을 걸어 대화를 시도하고는 했어요. 그리고 영어 공부 면에 있어서 제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키르기즈스탄은 공식어가 키르기즈스탄어와 러시아어라는 점인데 두 언어는 문법 등 언어 체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두 언어를 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 기본 근육이 갖추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참고로 키르기즈스탄어는 터키어의 한 맥락으로 한국어와 문법체계가 비슷합니다) 저는 키르기즈스탄어보다 러시아어가 세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을 생각해서 학교 교육도 러시아어 중심으로 바꾸는 등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영어에 관련해서도 보통 비영어권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발음이나 듣기 면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던 중 어느 날 언니로부터 키르기즈스탄인 고등학생들을 1년간 무료로 미국에 보내주는 미국 정부장학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어요. The Future Leaders Exchange Program이라고 불리는 교환유학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65명의 키르기즈스탄 학생들이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지는데 키르기즈스탄의 평범한 가정에서 사비 미국유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경쟁이 무척 치열했어요. 자격시험은 영어, 에세이, 인성 검사로 이루어졌는데 처음 지원하였을 당시 끝까지 합격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서류 관련에서 뜻밖의 문제가 생기게 되어서 그 해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며칠 동안 울기만 했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는 어렸고 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때 미국에 갔었으면 생활 적응이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무튼 1년 후에 재지원을 해서 통과가 되었고 제가 17세였던 2005년도에 미국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학교와 숙소의 위치는 워싱턴주에 있었는데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살면서 영어도 급격히 향상되고 무엇보다 제가 어릴 때 티비에서만 보던 미국에 직접 생활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세상에는 수많은 기회들이 있고 노력하는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1년 후 저는 키르기즈스탄으로 돌아와서 수도 비쉬켁 (Bishkek)에 있는 키르기 국립 법학대학 (Law Institute of Kyrgyz National University) 에 입학했습니다.
아이자다의 고향인 이스쿨 (Issyk-Kul)와 차로 약 4시간 이상 걸리는 수도 비쉬켁 (Bishkek)의 위치
3) 법전공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법을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차녀로서의 성장과정이 작용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첫째 언니에 제일 관심을 가져주시고 둘째인 저에게 관심을 덜 써주시니까 어릴 때부터 나름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웃음). 그래서 항상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또 아버지가 경찰관이셔서 늘 정의와 올바른 것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던 것도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어릴 때 키르기즈스탄의 부정부패를 실감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 전년도 전국 올림피아드 챔피언이었던 저희 학교의 학생을 제치고 지역 예선에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분명히 제가 점수가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예선에서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는데 알고보니 저와 경쟁했던 학생이 그 올림피아드 주최측 관계자의 자녀였어요. 그래서 반드시 법을 공부해서 키르기즈스탄 사회를 변화시켜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키르기즈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아이자다의 모교 키르기 국립대학.
4) 대학시절은 어땠나요?
아이자다: 대학시절의 초반기에는 경제적인 사정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다행히 장학생으로 대학을 합격하여서 학비는 면제였지만 생활비가 문제였습니다. 장학금의 일부로 생활 보조비가 나오긴 했지만 한달에 열 끼니를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어요. 다행히 언니가 같은 도시에서 키르기즈스탄 정부와 터키정부가 합작해서 세운 Kyrgyz Turkish Manas University 라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언니가 받는 장학금의 생활비가 꽤 많아서 언니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주위 대학생들이 자주 가는 클럽이나 문화 여가 활동을 잘 해보지 못했답니다. 그러던 중 대학교 3학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가 죠지 소로스 (George Soros) 가 키르기즈스탄에 설립한 소로스 자선재단 (Soros Foundation)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 생활이 크게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흥미진진한 아이자다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저자 약력: 런던 소재 국제금융기구인 유럽개발부흥은행 (EBRD) 근무. 유럽,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EBRD의 약 30여 개 개발도상국 관련 업무 담당. 해외 투자 은행, 사모 펀드, 임팩트 펀드, 프랑스 OECD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