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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Oct 06. 2016

찬란한 푸른 빛깔의, 라구스

Lagos, Portugal


라구스, Lagos, Portugal



해질녘의 라구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 정말 찬란한 순간들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그 때부터 영원해지기도 한다. 시간의 간극없이도 충분한 행복, 아름다움, 그리고 그리움. 라구스는 내게 그런 곳이다.




  라고스, 혹은 라구스. 포르투갈 자체에 정보가 거의 없던 내가 알 리가 없는 도시였다. 처음 이 도시에 눈을 뜨게 된 건 새롬이 덕분 이었다. -친구가 다녀왔는데 진짜 천국이래, 우리도 가자. -그래! 그렇게 라구스를 이번 여행 루트에 턱 집어넣었다. 찾아본 거라고는 인터넷에 올라와있던 글 하나. 바다가 있는 휴양 도시란다. 더 이상 바랄게 뭐가 있으랴. 떠나기 전부터 이미 이 도시는 내게 쨍한 파란색으로 각인되어 버렸다.


  라구스는 세비야에서 버스를 타고 약 다섯 시간을 달려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4년 전 첫 여행 때 만났던 세비야는 어쩜 그리 한결같은 지 4년 후 다시 만난 순간에도 날씨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40도는 가벼이 웃도는 스페인 남부의 위엄. 그래서 우린 또 그 더위에 스믈스믈 녹아버렸고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라구스로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까지도 찐득함을 선물해준 세비야와 조금은 후련한 안녕을 고하며 버스에 얼른 올라탔다. 아른아른거리는 파란 물결이 간절했다.


  버스는 조금 고역이었다. 속초 미시령 옛길이나 태국 빠이로 가는 도로처럼 구불구불한 건 아니었다. 원인은 바로 장장 다섯 시간동안 쉼 없이 수다를 떠는 10대 친구들에게 있었다. 스페인언지 포르투갈어인지도 모르겠는 그 지치지도 않는 그들의 빠른 대화는 그 어떤 소음들보다도 강렬했다. 새롬이는 눈빛으로 내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어필했고, 볼륨을 열심히 높힌 이어폰도 막지 못하는 그 혈기왕성한 수다를 참다 참다 우리는 그냥 웃음으로 승화시켜버렸다. 마침내 라구스에 도착하니 버스만 탔을 뿐인데도 하루가 끝나버린 것처럼 지치고 배가 고팠다. 제대로 기 빨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일단 밥부터 먹자며 짐을 질질 끌고 식당을 찾았다. 다행이 마을은 아주 작았고, 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시의 중심지가 나왔다. 주변을 급히 물색하다 프로모션이 덕지덕지 붙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라구스에서의 첫 끼를 해결했다. 역시 뭐든 잘먹는 우리는 만족스럽게 배를 채웠고,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 작은 마을은 어디를 가나 바다가 보였는데, 이 음식점 또한 바다를 끼고 있어 눈앞에 파란 빛깔이 넘실대는 선착장이보였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났다. 그렇게 기다리던 바다에 왔다. 우리 드디어 천국이라는 그 라구스에 왔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생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주소에 찍힌 대로 잘 찾아 왔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예약한 호스텔은 보이지를 않았다. 눈에 딱 띄는 하나는 이름이 다르다. 라구스 센트로 뒤에 난 오르막길을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아니, 도대체 어디란 거야. 안그래도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이 뻘뻘났다. 4년 전, 핸드폰도 없이 여행했을 때면 몰라도 이번엔 철저히 런던에서 쓰리심 유심칩까지 공수해왔는데 여기선 터지지도 않는다. 덕분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 한 시간을 넘게 숙소를 찾아다녔다. 여기저기 물어봐도 다 모르겠단다. 느낌 오는 곳이면 모두 문을 두드려 볼까 하다 괜히 레스토랑 주방문이나 열어 주방장님과 시덥잖은 인사나 했다. 


  어찌어찌해 결국 찾은 곳은 처음부터 눈에 들어와 혹시나 했던 뱅뱅 돌던 골목길의 바로 그 호스텔이었다. 비앤비로 예약해 호스텔이름이 다르게 등록되어 있던게 문제였다. 그래도 결국 찾았다는 안도감이 얼마나 크던지. 성큼성큼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 체크인을 하고, 땀에 찌든 몸도 씻기고, 차곡차곡 밀려있던 빨래도 했다. 호스텔은 가정집을 개조한 것처럼 보였는데 조금 좁기는 했으나 특유의 분위기가 아늑하고 따뜻했다. 바로 앞의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 뷰도 장난 아니다. 찾을 때는 고생 좀 했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호스텔 테라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포르투갈에 도착한 날은 2016 유로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호스텔에서 다시 나왔을 때 이미 해는 기울어가고 있었고 낮부터 들떠있던 거리는 훨씬 복작복작해져 있었다. 모두 축구 유니폼을 입고 상기된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경기를 보며 응원하고 술을 마셨다. 덕분에 모든 음식점이 만석이라 자리 난 곳을 찾으려 시내를 몇 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보는 거리의 사람들이 어찌나 유쾌해 보이던지. 축구에 크게 관심 없는 둘이지만 우리도 덩달아 신나 열심히 술을 마셨다(?). 경기는 포르투갈의 우승으로 끝났고 그 날 도로는 자정이 넘어서도 빽빽했고 모두 소리를 지르고 웃었다. 첫 날 밤을 그렇게 보내 항상 활기찬 도시인 줄 알았던 라구스는 알고 보니 오히려 평화롭고 조용한 동네였다. 그 날이 얼마나 그들에게 의미있는 날이었는 지 알만 했다.


유로 우승한 날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나머지 시간들은 열심히 몸을 태우며 보냈다. 이 곳의 조식시간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훨씬 느렸다.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느긋한 동네에 와서 우리는 답잖게 서둘러 가장 먼저 조식을 먹고 오전부터 바다에 나가 수영을 했다. 오후에는 잠시 호스텔에 돌아와 거실(거실이라는 단어가 정말 어울리는 공간이었다.)소파에서 한 숨 자고 또 다른 해변으로 갔다. 라구스의 물은 아주 차가웠고 해는 뜨거웠다. 그 시린 온도가 어찌나 짜릿하던지, 심장까지 얼어붙는 기분에 머릿속까지 시원해졌다. 꼭 냉탕과 온탕을 드나들 듯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나와 모래찜질을 하고 그러다 다시 들어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놀았다. 지난 동남아 여행때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던 새롬이는 6개월 동안 확 늘은 수영실력을 뽐냈고 나는 이미 지워지기 시작한 자세들을 애써 몸으로 기억하며 엉거주춤 바다를 유영했다. 배영을 하며 보는 눈부신 햇살과 붉은 돌산이 그림같이 둥둥 떠다녔다.


   라구스 바다에서 처음으로 스노쿨링도 했다. 둘 다 물을 좋아해 꼭 스쿠버다이빙을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프로그램은 있었으나 경비가 부족해 아쉬운 대로 스노쿨링을 신청했다. 그 날 스노쿨링 참가자는 우리 둘 뿐이었고 강사 에이미는 아주 친절했다. 쥐어 짜듯이 입어야 했던 답답한 잠수복은 신기하게 물속에 들어가자 편해졌고, 발이 닿지 않으면 지레 겁을 먹던 바닷속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눈을 제대로 뜨고 그렇게 오랫동안 물 아래의 세상을 본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신비하기도 했다. 세상에 오로지 나만 남은 것 같은 그 막막한 혹은 상쾌한 기분이 좋았다. 스노쿨링을 마친 후 새롬이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는’ 스쿠버 다이빙이 기대된다고 했다.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더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놀았으니 밥 때가 되면 항상 정말 배가 고팠다. 크게 맛 집을 찾아 가는 스타일들은 아니라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가 끼니를 때웠는데, 허기가 지니 당연한 소리겠지만 뭘 먹어도 맛있었다. 내륙에 있다 와서 그런지 생선을 그리워하던 우리는 바닷속 물고기들을 보고 와서도 참 맛있게 생선을 먹었다. 휴양지라 비싸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포르투갈인 만큼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물가도 싼 편이라 더 행복했다.


  저녁이 되면 호스텔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사실 처음 목적은 ‘경비 아끼기 프로젝트’였지만 라구스에 와서부터 점점 호화로운 마트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둘이서 먹고 싶은 걸 모두 만들려다 보니 손이 커졌고 우린 그걸 배부르다면서 또 열심히 먹었다. 술도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여행 한 달 동안 술을 먹지 않은 날이 이틀 뿐이다. 이번 여행의 테마가 혹시 술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할 정도였다. 또 다시 성장기가 온 것처럼 먹고 마시고, 대화와 음악으로 밤을 수놓았다. 밤의 바닷바람은 우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을 만큼 셌지만 그것도 즐거웠다.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마트 사치






  지친 몸으로 호스텔에 들어와 소파에서 까무룩 잠에 들었던 오후, 뺨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에 슬며시 잠에서 깼던 그 순간. 졸린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전 깜깜한 세상에서 들리던 티비 소리, 조용히 복작대는 각자의 소리들, 타자소리, 작은 발소리, 냄비 물이 끓고 칼질하는 소리.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불을 켜지 않아 잔잔히 어두운 방 안과 테라스에서 들어온 부드러운 햇살, 그 앞의 푸른 바다. 아마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일 거다. 그 순간 나는 조용히 벅차오를 듯 행복했고, 그 순간을 기억하는 지금의 나도 그렇다. 꼭 다시 오자고, 늙으면 별장을 사자고 수없이 말하던 곳, 상상보다도 더 푸르던 라구스였다.




 2016년 7월 10일 - 2016년 7월 13일, Lagos

 시리고 눈부시던 파란 바다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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