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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Sep 07. 2017

Avignon 아비뇽

아비뇽의 긴 바람





가끔 농도 짙은 바람이 불면 아비뇽이 떠오른다. 

여행 중 지나쳤던 그 많은 도시들 중 하필이면 아비뇽이, 유난히 자주 마음을 뒤흔들고 가버린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이 정도로 그 도시를 좋아했던가. 실은, 조금은 물탄 듯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어째 그 밍밍한 맛을 나는 가장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꼭 몇 년 전 파리 여행이 생각난다. 부푼 기대를 실망으로 잔뜩 바꾸고 떠나와놓고는, 지나고 난 후에야 은근히 그리워했던 파리의 것들이. 어쩌면, 나에게 프랑스는 그런 곳인가 보다. 자세히, 오래 음미해야 비로소 그 진짜 매력에 빠져버리는, 지나간 하나하나의 작은 순간들이 문득 일상을 흠뻑 적셔버리는, 그런 곳.     



아비뇽을 방문한 시기는 마침 국제연극축제가 성대하게 열리던 때였다. 꽉 찬 숙박시설 때문에 간신히 묵게 된 조용한 시내 외곽과는 달리, 시내 중심부인 성벽 안으로 발을 뻗게 되면 공기부터가 확 들떴다. 벽이며 바닥에 쫙 깔린 포스터들이 바람을 타고 현란하게 움직이며 우리를 맞았고, 연극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들이 사방에서 팜플렛을 나눠주고 다녔다. 길거리엔 광대나 춤꾼들이 구경꾼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그야말로 너무 연극적인 첫인상이었다.


      

수많은 연극들 중 심사숙고해 두 편을 골라 봤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공연장이 참 마음에 들었다. 성곽 안의 미로 같은 골목을 돌고 돌아 공연장을 찾아가면, 짠 하고 개성 있는 공연장이 나타났다. 서커스를 관람할 때는 천막이 쳐진 둥근 서커스 공연장을, 정극을 볼 때는 차분한 나무와 그늘 그리고 벤치가 있는 공연장을 만났다. 그것은 참 낭만적인 일이라, 나는 너무도 쉽게 공연 속 분위기에 끌려 들어가곤 했다.      



사실 아비뇽은 축제기간을 제외하면 참 조용한 도시라고 한다. 축제기간에도, 성곽을 벗어나면 마법이 풀린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아비뇽에서 머무는 5일 내내 변두리 숙소에서 묵은 덕분에, 축제를 벗어난 도시의 모습들도 가득 담아갈 수 있었다. 이 곳의 하늘엔 커다란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었고, 물먹은 하늘빛은 곳곳을 비추며 도시를 파스텔톤으로 물들였다. 눈을 흐릿하게 뜨고 세상을 보는 것 마냥 시린 느낌이 가득해서, 우리는 그걸 ‘프로방스의 색‘이라 명명했다. 어쩐지 프로방스 화가들의 그림을 이해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축제는 화려했지만, 사실 더 많이 떠오르는 아비뇽의 것들은 도시의 색 혹은 바람 같은 것이다. 바닷바람 못지않게 불던 바람과, 짧게 스쳐가는 빗방울들. 이른 아침 조용한 도시에서 쓸쓸하게 휘날리던 포스터들도 생각이 난다. 그것이 진짜 아비뇽의 모습인 것 마냥, 그런 것에 더 마음이 쓰이고 만다.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던 그 색감들이 아직까지도 문득 나를 건드린다. 선선해진 가을바람에 또 한 번 그 도시를 떠올리는 것 같이. 은근한 것들이 자주, 은근하게 찾아온다.


     

어쩐지, 다시 아비뇽을 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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