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날: 2019.1.7.
어느 여름 날 로마의 상점가를 걷고 있었다. 판테온에 다시 들를까 생각하다 갑자기 멈췄다. 방금 지나친 쇼윈도에 굉장한 것이 있었다. 돌아서 보니 남성복 매장이었다. 쇼윈도에는 완성품도 아니고 시침질을 막 마친 듯한 정장이 있었다. 정말 멋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름이 브리오니(Brioni)였다. '여성 정장도 팔려나, 해외배송은 하려나' 생각하며 걷던 길을 마저 걸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브랜드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이 2010년이었으니 브리오니라는 브랜드의 전성기 끝자락을 보았던 셈이다.
브리오니는 1945년 로마에서 출발한 이탈리아 남성 정장 브랜드이다. 1945년은 유럽의 내리막길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유럽은 식민지도 권력도 잃고 심지어 전쟁의 주인공도 아니게 되었다. 힘이 있으면 과시할 필요가 없지만, 힘을 잃었거나 원하면 과시해서 증명받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브리오니는 귀족의 전속 재단사 급의 맞춤 정장을 상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그것도 소유하는 것만으로 과시할 수 있도록 높은 가격에 제공하여 대박을 쳤다. 전쟁 후 신흥귀족이라 할 영화인들을 비롯하여 정치인, 재계 거물들이 브리오니의 단골이 되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단단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유럽 너머로도 이름값을 팔 수 있었고, 남성복 패션쇼나 트렁크 쇼(주: 상점 내 패션쇼) 같은 전례없는 마케팅을 펼치면서도 브랜드 가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 세기말, 아직 유럽이 세계의 상류층이라는 인식이 남아있고 어떤 남자든 성공의 마지막 단계로 유럽 귀족이 되기를 꿈꾸던 시절이 사실상 브리오니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세상이 변해버렸다. 브리오니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유럽의 부유층은 줄어들고 먼 아시아로 돈이 몰리고 스티브 잡스 같은 젊은 부자들이 청바지 차림으로 일을 하며 청년들에게 정장을 버리라고 부추겼다. 브리오니를 알아주던 구세대는 사라지고, 신세대는 몰라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최근 언론은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브랜드 대신 브리오니만 입는데도 브랜드 홍보효과가 없다고 놀란 바 있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트럼프는 유럽이 자신을 알아주길 애타게 기다리는 20세기 미국 부자의 상징과 같은 인물인데, 브리오니를 입지 뭘 입겠나, 브룩스 브라더스? 그 사람 또한 지나간 옛시절의 잔재일 뿐인 것이다.
결국 브리오니는 하락세를 돌이키지 못하고 2010년대에 프랑스 케링(Kering) 그룹에 팔려버렸다. 케링의 전신은 프랭탕 백화점이니, 우리 식으로 치면 무형문화재 대목장이 롯데백화점 직원이 된 느낌이다. 케링이 럭셔리 전문 그룹이라 하나 스포츠 브랜드 푸마를 정리하고 럭셔리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 고작 작년이고, 잘나가는 구치를 거느리고 있다 하나 구치는 가격이 고가일 뿐 대중을 상대하는 브랜드라 비교 대상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케링은 지주회사, 즉 덧정없는 주주모임이다. 지주회사가 다른 회사를 사들이며 노리는 것은 두 가지, 성장과 시너지이다. 이것이 브리오니 같은 럭셔리 브랜드에는 독인 것이다. '양보다 질'이 생명인데 '질보다 양'적인 성장을 강요당하고, 브랜드의 개성이 곧 가치인데 시너지를 내기 위해 다른 브랜드와 공동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지주회사 밑으로 들어간 럭셔리 브랜드가 흔히 보이는 망조가 세가지 있는데, 하나는 빨리 팔 수 있는 쓸데없는 물건을 만들어 브랜드 가치를 희석하는 것(선글라스, 지갑, 향수 등), 둘은 별 생각 없이 다른 시장으로 확장하는 것, 셋은 영화로 치면 감독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마구 갈아치우는 것이다. 브리오니는 셋 다 겪고 있다. 일례로 케링에 팔린 직후에는 영국인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들어와 앉더니, 2016년에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보겠다고 거리패션으로 유명한 호주인을 앉혔다. 이 자가 메탈리카를 모델로 세우고 마피아한테 팔면 어떻냐고 설치자 놀라서 7개월만에 내쫓고, 그 직후에는 아방가르드 전문가를 불렀는데 그조차 1년만에 나가서 지금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케링 휘하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면. 규모를 줄이고 로마 지역의 강소 브랜드로 남을 수 있다면. 웨이팅 리스트를 마케팅 도구로 내세운 에르메스가 최근까지도 견고한 실적을 보이는 것처럼, 브랜드 가치를 지키면서 생산량을 줄이면 소비자들은 오히려 찾아온다. 젊은이들의 유행이 아니라 '어른의 목표'라는 관념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자산과 일가를 거느리고 국정에 참여하며 예술과 문화의 보호자가 되고 싶다는 남자의 욕심은 남자 아닌 내가 보아도 고대 이집트부터 중국 공산당원까지 참으로 일관적이다. 브리오니는 그 결에 닿아있기에 성공한 것이었는데.
나의 브리오니. 나는 입을 일이 없고 남편에게도 종로양복점을 권할지언정. 내 마음의 정장은 브리오니였는데.
늙은 사자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그 사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다.
같은 글: https://www.facebook.com/733824596655793/posts/2131515836886655/
커버 출처: Brioni spring/summer 2021 campa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