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날: 2019. 2. 8.
2008년 여름에 일본 교토에 들렀다. 기차역에 내려 여행안내소에서 숙소를 문의했다. 기모노협회 옆집이었던가, 전통공방거리의 민박을 추천받아 일주일 정도 묵게 되었다.
속을 알 수 없다는 일본 사람들도 교토 사람 속내는 모른다더니, 빈틈없는 예의를 마주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순간이 적지 않았다. 나는 분명 도쿄 말투를 배웠고 교토 방언이라는 "오오키니(감사합니다)"도 단정하게 반복했는데, 대화 끝에 '오사카 말을 쓴다'는 소릴 들으면 '내 말이 거칠다는 표현을 돌려 하는 것인가'하고 괜히 염려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루는 기온 거리를 걷다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 벽을 가득 채운 부채의 행렬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부채는 게이샤들이 하얀 부채에 붉은 글씨로 기명을 적어 명함대신 주는 것이라는데, 교토에서도 그렇게 부채가 많이 걸린 점포는 처음이었다. 사장님에게 연유를 물으니 게이샤 견습생인 마이코들에게 출입이 허용된 간식점은 이 곳이 유일하기 때문에 마이코들이 성장하고도 추억을 찾아 들르고 또 들른다는 것이었다. 교토에 머무는 동안 하루에 한 번은 그 카페에 들렀는데, 게이샤나 전통예능인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주로 사장 아저씨와 교토 이야기를 했다. 왜 왔냐기에 오다 노부나가의 팬이라 혼노지 터를 보고 싶다 했더니 금방 마음을 열어 주셨다. 혼노지 터는 별것 없다시기에 그럼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좋아하니 그 절이라도 봐야겠다 했더니 본인도 미시마 유키오의 팬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것이었다.
또 하루는 아침에 거리를 걷다 <쇼에이도(송영당)>이라는 간판이 걸린 점포를 발견했다. 향 가게였다. 향을 화장품이나 고급과자처럼 세련되게 진열한 모습에 한 번 반하고, '시간의 향' 같은 고아한 이름이 붙은 향들을 시향해 보고는 또 반했다. 3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라는데 지루하지 않았고, 향들이 하나같이 은은하고 영리했다. '비의 향'은 산뜻하면서 축축하게 감싸드는 느낌이 들고, '눈의 향'은 춥고도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잔뜩 사버렸다.
오후에는 재일교포들이 사는 우토로 마을에 들렀다. 학생이 알고자 왔다고 하니 젊은 이장님이 설명해 주셨다. 요인즉슨, 주민들이 북한과 연이 닿은 것은 정치 때문이 아니라 전쟁 후 도와준 곳이 북한 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착잡한 마음을 안은 채 어두워질 무렵에는 도시샤 대학에 들렀다. 윤동주의 시비가 그곳에 있었다. 한글로 새겨진 <서시>를 읽고, 시비 위에 '달의 향' 몇 가닥을 두었다. 이런 경우의 예법은 모르지만, 대학생들이 오가다 향을 보고 '이 시비가 버려진 것은 아니었군'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교토를 떠나는 날 카페에 들렀다. 평소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건너 듣던 사모님이 한국 딸내미 밥은 먹여야 한다며 아침 한 상을 차려 주셨다. '밥값할 겸 인사드리러 또 올께요' 하고 헤어졌다. 정말 다시 갈 셈이었는데, 기회가 생길만하면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다. 실은 가지 못할 바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귀국하고서야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에 이른 극우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저씨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어리게도 답을 못했다. 향도 마찬가지였다.
향을 피우는 취미에는 정이 붙었다. 당시 일기를 인용하자면 "정말이지 간단하고 신속하게 기분을 바꿔주는 좋은 도구다. 실내생활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다만 윤동주 시비에 일본향을 두고 온 것이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 일본 노포의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우리나라 향을 이리저리 찾아 보았다. 고급 향목을 개인적으로 주고 받는다는 향 장인에게 몇 가닥을 얻기도 하고, 조계종 스님에게 사찰에서 쓰는 향 중 좋은 것을 추천받기도 했으나 영 정이 붙지 않았다. 쇼에이도의 좋은 점이 우세했다.
별 수 없이 인터넷으로 살까 했지만 시향을 해 볼 수도 없고 쇼에이도의 향을 사는 느낌이 들지 않아 포기했다. 지금도 십여년 전에 산 향을 아끼고 아껴 손님이 오거나 할 때 조금씩 피우곤 한다. 그 때마다 향의 품질과 여행의 추억이 어우러져 애틋하다.
쇼에이도에 들른지 10여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좋은 것은 좋을 뿐인데, 왜 쓸데 없는 고민을 했을까. 그 점포를 발견한 순간의 설레임, 들어선 순간 감싸는 향의 우아함, 향을 고르고 마침내 구매하던 순간의 만족감이 지금도 생생한데. 이제는 어서 교토에 다시 들러 카페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츠루야의 꽃같은 화과자를 감상하고, 쇼에이도의 새로운 향을 구해오고 싶다.
같은 글: https://www.facebook.com/733824596655793/posts/2177772665594305/
사진 출처: Shoeido 인스타그램(instagram.com/shoyeido_inc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