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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Feb 16. 2017

D228. 우리는 숲

Part2.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는 법, 북미 로드트립_미국


뜨거운 태양 아래 푸른 태평양의 바람을 만나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Pacific Coast Highway – Route 1


Bixby Creek Bridge



그동안 춥다고 쓰지 못하던 선루프부터 창문까지 모두 활짝 열어놓고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맡기니, 길 위의 시간이 길어져 마음까지 둔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티 내지 않던 고민들이 가볍게도 날아가버린다.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온도와 습도와 바람과 햇살의 조합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 


한동안 적잖이 뚱하던 두 사람이었다. 꺼지지 않는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들은 어지러웠고 버려지는 엄청난 양의 음식물을 보면서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떤 즐거움을 위해 이 모든 지구의 에너지와 식량을 이렇게까지 낭비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서 버려지는 것들로 지구 어딘가 지붕 없는 누군가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즐기고 어디서부터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가. 자꾸만 남미에 있을 때 조금만 비싸도 투덜거리고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겠다고 끈질기게 흥정하고 안 사고 안 먹고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속이려는 마음이 괘씸해 버티고 따졌다지만, 진짜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세상은 어디인지, 진짜 합리적이지 않고 부당한 것은 어느 쪽인지. 메마른 사막 위의 섬처럼 혼자 빛나고 있는 이 도시는 이미 세상 어디에나 있다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야말로 외딴섬 같은 존재였다. 


아무것도 없는 해안 절벽 위의 캠핑장에서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기분을 느낀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캘리포니아 주립 바닷가 캠핑장에서는 자연을 위해 물과 전기도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자연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성수기에는 예약 없이 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아름다운 캠핑장에 마지막 딱 하나 남은 자리를 운 좋게 차지하고 눕는다. 


언제나 자유로운 여행자였지만 이 순간 왠지 "자유다!"라고 한번 더 크게 소리치고 싶다.



우리는 숲


캘리포니아의 해안도로를 달리고 달려 북쪽으로 향한다. 이번 여행에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게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것도 랜드크루저를 타고. 그때 그날 우슈아이아에서 오래된 카페에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기에 우리가 있었을까.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여행자들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 우리. 멕시코부터 남미 대륙의 끝까지 스쳐간 수많은 장소와 사람들, 달라진 우리의 속도, 결국에 그날 그 시간에 우슈아이아의 오래된 카페에 이르게 된 모든 우연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피어오른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여행은 숲에서 시작되었다. 멕시코로 향하던 길, 미국을 경유하며 제일 먼저 들렀던 곳이 요세미티 국립공원이었고, 멕시코로 떠나던 날 아침, 머물던 샌프란시스코 친척집에서 마지막 산책을 나섰던 곳 또한 동네 외곽의 숲이었다. 바로 이 레드우드의 향으로 가득 차 있던 숲.



Redwood National and State Parks



숲숲! 숲숲! 


가슴을 활짝 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바다에서는 바다가 좋다고 난리를 쳤는데 숲에 오니 온몸을 타고 흐르는 맑고 시원한 공기에 발가락 끝이 간질간질,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콧구멍을 크게 열고 조금이라도 더 마시고 싶은 공기. 내 몸 구석구석, 가능하다면 주머니에라도 마구 집어넣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나는 그런 공기! 더구나 나조차 잊고 있던 이 레드우드의 향기가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파타고니아 이후로 만난 적 없는 청량함도 감동이지만 이 레드우드 특유의 향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허파에 바람이 든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보이는 거라곤 키가 큰 나무들 뿐이고 들리는 거라곤 바람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뿐인데 실없이 웃음이 쏟아진다. 


“여행 전에는 바다가 좋냐 산이 좋냐 묻는 질문이 어려웠는데, 나와 보니 알 것 같아. 나는 산, 나무, 숲!”

“나도. 바다보다는 역시 산이지!”


사실 숲을 따라 걷다 보면 바로 바다가 나오는 모든 걸 다 가진 국립공원이지만, 태평양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왔으니 오늘은 숲을 만끽하자고.







무인 키오스크에 돈을 넣고 텅텅 빈 숲 속 캠핑장 원하는 나무 아래 차를 대니 우리의 존재는 장난감처럼 작게만 느껴진다.




고요한 아침 숲 속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잠은 덜 깼지만 역시 숲 속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상쾌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침낭을 뒤집어쓴 채 트렁크 문을 활짝 열고 새벽 숲 공기를 맞으며 다시금 외친다. 


우리는 역시 숲이라고. 


오롯이 숲의 한 가운데에서 손 끝에 전해져오는 따끈한 커피의 온도, 시원한 공기를 뚫고 얼굴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최고의 순간! 믿기지 않는 황홀한 꿈에서 막 깨어나 빠져나오기 싫은 이불속 아침처럼 한참이고 누리고 싶다. 원하는 만큼 달려갈 수 있고 어디든 차를 대는 곳이 세상에서 가장 전망 좋은 우리 집이 되는 꿈같은 삶이 현실이 되어있다.







그렇다, 현실은 현실.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채비를 하고 숲을 떠나려는데 거짓말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그냥 아름다운 꿈처럼 마무리될 리가 없지. 현실은 언제나 현실.


말이 씨가 된 건지, 좋아하는 숲에서 더 머물다 가라는 하늘의 계시인지 오래된 중고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겪고 지나간다는 배터리 방전이 하필이면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숲 속에서 일어났다. 오전의 여유를 남겨둘 새도 없이 당황한 두 사람은 도로에 나가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고 정말 다행히 케이블을 가지고 있던 공원 직원의 도움으로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었다. (중고차로 여행할 때는 충전용 점퍼 케이블을 꼭 챙깁시다ㅜㅜ)







잠시 쫄깃했지만 다시 한번 숲 향기 크게 들이마시고 가슴을 활짝 펴본다. 오늘도 태양을 마주하고 살아냈기에 밤은 더욱 달콤하고 돌아갈 곳이 있기에 더 소중해지는 길 위의 시간들. 커다란 나무야, 두 번 세 번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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