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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기 Mar 23. 2020

장군의 수염

이탈된 자라 불리는 사나이

철훈이 죽었다. 그의 사인은 연탄가스 중독이었으나 명수사관은 그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사람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셋방 주인을 만나고, 그의 동료들을 만나고 그녀와 동거했던 신혜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삶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사진기자였던 철훈은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 소설의 제목이 '장군의 수염' 모든 이들이 장군을 따라 멋진 수염을 기르는데 한 사내만 수염을 기르기를 거부한다. 그는 끝내 배제되는 미완성 소설이다. 철훈 역시 소설의 사내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탈자의 모습이다. 지주의 아들로 손가락질받았고, 이념의 대립을 온몸으로 겪고 전쟁으로 망가진 인간들, 여기에 신혜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망가지고 그녀뿐 아니라 가족 역시 전쟁 속에 무너져야 했다. 그들은 이 고통을 '고해 게임'을 통해  토해낸다.

하지만 신혜는 떠나고 철훈은 사회에서 더욱더 고립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한국전쟁을 겪고,  4·19와 5·16을 목도하고 체험하고 격동하는 역사 속에 상처 받고 불안 속에 존재했다. 이 상실과 트라우마는 사회로부터 격리되게 했으며 전후 빈곤의 환경은 따듯함보다는 죽음의 허무함, 가득 찬 비관주의로 표현된다.

명수사관은 철훈의 죽음의 여정을 함께 한다. 이는 시민 케인의 서사와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로즈버드'를 추적하는 이들처럼 철훈의 죽음의 이유를 추격하는 이들처럼 말이다.


"나는 범인을 보았다. 고독이라는 놈, 그놈은 갑자기 흉기를 들고 사람을 찌른다. 어두운 밤비가 내리는 밤에 축축한 골목길에 서성거리다가 방문 틈으로 들어온다. 혼자 누워있는 침대의 시트를 젖히고 가슴을 찌른다."


영화 말미 명수사관의 독백처럼 산업화되어 가는 사회, 치유받지 못한 영혼,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이들의 슬픈 군상이다.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색, 이성구 감독이란 스탭 쪽 상표로 그레 내세우고 프랑스 영화 여와 남을 떠오르는 인상을 누다.  -중략- 신성일의 그 굳어버린 연기 때문에 오히여 적역을 얻은 셈이고 윤정희는 얼굴로 한몫 보며, 드물게 신자의 자세를 지난 목사 전창근 씨의 열연이 두드러진다. 애니메이숀과 모노크롬을 쓰고 스토리 전개와 관계없이 오토바이 경찰을 간간이 등장시키는 등 양화풍의 멋을 대담하게 부렸다. 이른바 현대의 고독에 식상한 관객들조차 그것을 한 번쯤 되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동아일보/1968.9.17)


"문제작", "실험작"


"이를테면 방과에 이색소재를 끌어들여 새 국면을 개척한 스타프진에 의해 과감히 다루어진 감각적으로 참신한 작품이다. 더구나 이성구 감독은 결정적으로 그의 실험정신을 발휘, 전위적 영화 용어를 구사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러한 영화 기법으로서의 용어들이 나열된 데서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통일된 자세로써 어필해왔었더면 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새로운 문제성을 제시한 작품임엔 틀림없다."(경향신문/1968.9.14)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루브르 박물관 소장                                                        


철훈의 방 한 구석의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이란 작품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세네갈로 향하는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되어 뗏목에 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출항할 때 인원은 약 400명, 식민지로 향하던  배는 자초되고 선장과 장교들은 구명선을 타고 먼저 달아난다. 뗏목의 남은 사람들, 살기 위해 살육하고 서로의 피를 먹고 구조선을 기다리며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구조선이 그들과 조우했을 때 살아있는 이들은 단지 15명, 이마저도 육지도 가던 중 5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제리코는 죽은 시체를 생생하게 담기 위해 시체 검안소에서  죽은 이들의 몸을 살피고 참혹했던 뗏목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생존자를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그림에서도 회색빛으로 죽은 자의 얼굴이나 굳어 경직된 근육, 공허함 뿐 아니라 생존자의 초점 잃은 시선이 눈에 간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 극한의 경험에 인간의 존엄이나 숭고함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살기 위한 처절한 절규가 온몸으로 드러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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