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1985년 발표한 캐나다 작가의 소설로 전쟁으로 모든 문화가 사라지고 철저한 계급사회, 감시 사회가 된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어 현재는 자원이 매우 부족하고 출산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임신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그런 논리와 전체주의 사회가 만나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철저하게 계급이 나뉘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시녀’, 일하는 여성은 ‘하녀’ 엘리트 계급인 사령관의 ‘아내’ 등이 있다. 화자는 그중 ‘시녀’로 살고 있다. 시녀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신성한 자원이다. 그래서 엘리트의 집에 대리모로 들어가서 매달 임신을 시도한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철저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자로만 살아야 한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행위로도 처벌받을 수 있고, 그 처벌이란 잘하면 ‘콜로니’로 보내져서 화학 물질을 청소하며 평생을 사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처형되어서 시체가 광장에 매달리는 꼴을 당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웃어서도 안 되고 재미있는 대화를 해서도 안 된다. 시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시녀와 짝을 지어 가는 장보기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이 되게 하는 특성이 모두 제거되고 용도로만 쓰여야 하는 사회다.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아야 하고 특히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워낙 생경한 사회를 아주 촘촘하게 그려서 따라가기가 힘들기도 하고 워낙 음울해서이기도 하다. 화자는 시녀가 되기 전 ‘구시대’의 생활을 자주 생각하는데, 그때도 많이 흉흉했다. 화자의 직업은 도서관에서 책을 모두 디지털 자료로 옮긴 후 파쇄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계좌가 정지되고 재산이 남자의 재산으로 귀속되는 조치가 내려진 후 직장도 사라졌다. 완전한 전체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나마 그때 누리던 모든 것이 이제는 사라졌다. 책이나 음악, 잡지 같은 문화는 사라졌고 자살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치워진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없이 과거를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며 그나마 시녀 노릇도 세 번 실패하면 콜로니로 가야 한다. 아마 가장 끔찍한 것은 수태를 위한 의식에 모든 집안 식구가 함께하고 아내와 시녀가 딱 붙어 사령관과 접촉한다는 점일 것이다. 정말 기괴하기도 하고 모든 계급의 여성뿐 아니라 계급이 제일 높은 사령관마저도 끔찍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결혼 후 한동안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 나를 나로 보지 않고 ‘임신 못 한 여자’로 보는 시선이 힘들었다. 가족과 지인들이 나를 보기만 하면 임신 소식을 물었고 나를 대하는 태도에 기본적으로 임신이 전제로 깔려 있어서 무척 슬펐다. 그러다 임신한 다음에는? 나조차 나를 엄마로 보고 그 역할에 몰두해서 내가 누구로 보이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몰두한 나머지 다른 사람 역시 각자의 모습으로 산다는 걸 망각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출산율이 너무 떨어진 나머지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여자아이들을 1년 일찍 학교에 보내라는 둥, 케겔 운동을 체조로 하라는 둥. 생각해 보면 여자의 출산은 늘 국가의 어젠다였다. 너무 많이 낳을 때도 국가가 나섰고 너무 적게 낳는 지금도 열심히 나선다. 산아제한을 할 때는 그게 여자의 삶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됐기 때문인지 여자들이 말을 잘 들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이를 낳으라는 국가의 설득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여자들이 아주 많다. 이렇게 통제하는 권력이 있으면 꿈틀거리며 틈을 만드는 개개인이 있다.
길리어드라는 이 나라도 역시 그런 틈이 있다. 화자가 얌전하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사령관도, 함께 짝을 지어 장을 보는 오브글렌도, 사령관의 수호자 계급인 닉도 나름대로 조금씩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마치 새로 결혼하거나 직장에 들어간 사람을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좀 통하는 것 같다 싶으면 그제야 슬슬 마음을 여는 닫힌 집단의 일원들 같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조금씩 틈을 보이고 화자가 시녀 아닌 다른 일로 호기심과 정을 느끼기도 할 때마다 희망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
초반을 읽으면서 비인간적인 사회 체계를 굳건히 세워 개개인을 통제하는 북한 사회가 많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쪽도 한국 드라마도 보고 암시장도 활발하게 열린다고 하고 무엇보다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길리어드 사람들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는 자식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자식은 끝없이 반항한다. 엊그제 여자중학교 기말고사 시험에 학부모 감독으로 봉사하러 다녀왔다. 거기서도 45분 동안 조용히 시험을 봐야 하는 중학생들이지만 과목이 한문이다 보니 7분 만에 정적이 깨졌다. 엎드려 자는 아이들은 그나마 양호하고 시험지에 낙서하고 삐딱하게 앉고 음료수 마시고 옆 친구 흘끗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내가 안절부절못했고 45분이 지났을 때는 기진맥진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시녀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궁금했다.
생명이 이렇게 통제되지 않고 반항한다는 건 어찌 보면 너무 고마운 일이다. 인간 내면의 질서에 따라 산다면 적어도 독재자의 엉성하고 권위적인 틀에 굴복해서 스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화자의 행각은 결국 들키고 무시무시한 밴에 끌려갈 운명이 됐다. 모든 책임은 그녀가 뒤집어쓴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 사회도 여전히 똑같은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극단적으로 그려졌지만 이런 전체주의 사회와 그런 사회를 설계하는 심리를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조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음껏 읽고 쓰고 돌아다니는 자유와 타인과 웃으며 대화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권리가 소중하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