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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인너마저 Jan 21. 2023

공공디자인에서 그 나라의 디자인 수준이 보인다

무엇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는 스위스 사람들

여러분은 서울 지하철이나 KTX를 이용할 때 시계를 보신 적 있나요? 혹은 기억에 남는 인포그래픽이 있다거나, 누군가 서울메트로나 KTX의 로고를 그려달라고 한다면 그릴 수 있을까요..? 스위스 철도청 SBB(Schweizerische Bundes Bahnen)은 이 모든 게 가능하더라고요. 저는 단 며칠의 여행을 했을 뿐인데 말이죠. 어느 정도 다른 레벨의 디자인을 기대하긴 했지만, 얼마 전 다녀온 스위스 여행에서 그 이상을 보고 느낄 수 있었는데요, 한 번 써 내려가 보겠습니다.



# SBB와 디자인 매뉴얼

스위스는 공용어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총 3개라서 SBB CFF FFS라고 모두 쓰여있네요

매일 수백만 명이 접하는 이 로고는 무려 197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유지되고 있죠. 로고 사인은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순간의 인식만으로 명확하게 의미 전달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조형적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또 주변 환경과 어울리면서도 돋보여야 하고, 궁극적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대변해야겠죠. 시간과 약속을 잘 지키는 것, 신뢰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철도 영역에 있어 굉장히 잘 어울리는 로고라고 생각합니다.



스위스 기차역의 어딜 가나 오프라인의 인포그래픽, 플랫폼 번호, 방향 안내판등의 시각적 사인물이 일관성 있게 잘 관리되고 있었는데요. 이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매뉴얼이 정리되고 관리되고 있더라고요. 음... 스위스야 뭐 워낙 타이포그래피나 제품 디자인을 잘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오프라인 디자인 매뉴얼뿐 아니라, 디지털 매뉴얼도 웬만한 IT기업 못지않게 챙기고 있더라고요. SBB App의 완성도가 높아서 놀랐었는데, 그 이유가 이렇게 철저히 매뉴얼이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아래 웹사이트 링크도 걸어놓았습니다.

https://digital.sbb.ch/en/brand-elements/logo



# Apple이 탐냈던 SBB의 시계

스위스 기차역마다 볼 수 있는 시계가 있습니다.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정보는 시간에 대한 것이겠죠. 계속 쳐다보게 되는 그 시계를 SBB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직접 디자인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흰/빨/검 컬러만 사용하면서 절제되면서도 깔끔 명확하게 디자인된 이 시계 디자인이 애플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미지의 왼쪽, 지난 2012년 iOS6의 시계 App 디자인을 한 번 보시죠. 거의 똑같은 디자인을 사용한 것이 나중에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애플이 스위스철도청에 상표 도용권으로 228억의 라이선스 비용을 냈습니다. 이 시계는 무려 1944년 스위스 철도청의 직원인 한스 힐피커(Hans Hilfiker)가 디자인한 것으로 현재는 스위스의 거의 모든 기차역에 걸려있고 손목시계로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래 이미지처럼 디지털로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죠. 플랫폼 위에 가만히 서서 유려하게 움직이는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던 때가 떠오르네요. 그러고 보니, 애플의 기본 서체가 Helvetica였던 걸 보면 애플은 참 스위스 디자인을 좋아하나 봅니다. 


# Museum Für Gestaltung

Museum Für Gestaltung

스위스는 Helvetica와 Univers로 대표되는 타이포그래피의 성지일 뿐 아니라, Freitag, Vitra, USM, Logitech 등 익히 알려진 제품 디자인 강국입니다. 스위스까지 와서 디자인 전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죠. 제가 찾은 취리히 디자인 뮤지엄은 1878년에 설립되었고 총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근에 추가된 곳은 기존 우유 공장이었던 대형 건물을 개조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건물도 엄청 크고 천장도 높고 그렇더라고요. 취리히에는 미술 관련 박물관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그래픽 디자인이 역사적으로 타 분야보다 강하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 디자인 뮤지엄이 이렇게 3개씩이나 공간을 각각 사용하며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 특유의 쓸쓸한 느낌의 겨울비가 내리던 날 저는 두 군데의 취리히 디자인 뮤지엄을 다녀왔는데요. 그중 미술대학과 붙어있는 곳에서 Willy Guhl의 전시를 감상하고 왔습니다. Willy Guhl(1915-2004)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현대 공공 디자인의 근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레전드 디자이너입니다. 

1950년대 만들어진 콘크리트 화분 공공디자인
유럽 최초의 플라스틱 Bucket Seat

디자인은 사용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니즈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지속성과 기능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네요. 전시는 Willy Guhl의 작품을 경험하고, 분해해 보고, 프로토타입은 어땠는지 살펴볼 수 있었고, 다양한 당시의 사진과 기록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 Willy Guhl의 가구들은 워낙 고가라서 해외 셀럽들이 많이 구매해서 갖고 있다고 하네요. 전시 뒷부분에는 Willy Guhl이 취리히 예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일 때 그의 디자인 철학과 궤를 같이한 제자들의 작품들도 볼 수 있었는데요, 제 시선을 끌어당긴 녀석이 있었습니다.




VBZ 하나를 만들어도 제대로 

취리히 교통 공사 자동 티켓판매기 프로토타입

이 프로토타입은 취리히 교통 공사 VBZ(Verkehrsbetriebe Zürich)가 운영하는 모든 트램, 버스 정류장에서 볼 수 있는 티켓 판매 기계입니다. 여행 중에 시내 곳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기계인데요. 이 기계가 언제 디자인되어 지금까지 운영 중인지 궁금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무려 1987년에 디자인되었고 그때 이후로 설치되어 현재도 사용 중이더라고요...

1987년의 프로토타입 디자인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네요. 35년을 소프트웨어만 개선해서 잘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스위스 사람들은 무엇 하나 허투루 만드는 법 없이 어떻게 하면 오래(Durability), 기능적(Funtionality)으로 부족함 없이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여 만드는 것 같습니다. 모든 디자인이 그렇겠지만, 특히 공공디자인에서는 이 3가지 포인트가 중요해 보이네요.

취리히의 트램, 연식은 각각 달라도 취리히를 상징하는 컬러로 칠해져 있음


# 우리도 잘할 수 있을까

성동구에 가면 이렇게 생긴 버스 정류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 쉼터라고 불리는 이 버스 정류장은 공공 디자인의 관점에서 좋은 예시 같습니다.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전면이 개방된 유리로 되어있어 사각지대 없이 밖에서도 잘 보이고(범죄 예방 효과도 있겠네요), 내부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시각적으로도 쾌적함을 느낄 수 있죠. 더불어 의자와 스탠딩 테이블이 각각 비치되어 있고 교통 정보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죠. 남녀노소를 모두 배려한, 기능적이면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이제 다 보이시죠? SBB의 로고와 인포그래픽, 자동 티켓 판매기

제가 서울에서 35년 살면서 기억에 남는 버스 정류장의 모습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스위스는 80년대에 만든 정류장을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는데, 우리는 매번 바뀌긴 하는데 그저 예산을 쓰기 위해 급하게 만든 건지 금세 또 허물고 다시 짓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심야 버스 노선도: 심야라는 시간적 맥락에 맞게 검정 배경에 노란색 포인트

공공시설에서 마주치는 디자인의 수준이 곧 그 사회의 품격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품격을 스위스에서 처절하게 느꼈는데요.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와 동시에 편리함을 얻었지만, 과연 쓰는 사람을 '배려'하면서 '실용적 가치'를 가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어디에 내세울한 공공 디자인 시설물이 있는지 떠올려보면 뚜렷하게 보이는 게 없네요. 아직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상가 건물 간판부터 버스 정류장까지... 


Helvetica


본문의 폰트를 Helvetica대신 본고딕을 선택하며, 아쉽고 부러운 마음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https://museum-gestaltung.ch/en/ausstellung/sbb-cff-ffs/

https://museum-gestaltung.ch/en/ausstellung/willy-gu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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