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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색머리 Dec 29. 2016

상상 속의 당신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11.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서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허브차 한잔을 홀짝이며 알랭 드 보통의 신작 소설을 읽고 있었다. 하늘색이 참 예쁜, 비교적 포근한 겨울의 주말 낮이었다. 내 옆 테이블에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아빠와 마주 앉아서 초콜릿 바를 까먹으며 조잘조잘 말도 많았는데, 그 통통한 볼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오물거리는 모습을 자꾸 훔쳐보게 되었다. 


'아빠, 내가 그랬잖아~ 그거 기억나? 나는 기억나는데? 아빠는 기억 안 나?' 


꼬마의 아빠는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빠의 앞에는 펼쳐놓고 읽지는 않는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꼬마의 엄마는 서점 어디선가 책 구경을 하고 있었나 보다. 아이가 엄마를 찾으면 아빠는, 응, 엄마 책 구경하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레고 조각 몇 개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껌으로 풍선도 불어 아빠에게 자랑도 한다. 




처음에는 그저 가만히 귀만 기울였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 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가 훗날 사랑하게 될 어떤 남자와 함께하는 주말 오후를 살며시 떠올려 보았다. 나는 평소 이성에게 끌릴 때 진심으로 외모는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주장하고 다녔는데, 어라, 상상 속 남자의 외모가 왠지 굉장히 디테일하다. 내가 저렇게 생긴 사람을 좋아했었나?, 잠시 고민한다.


나는 상상 속의 남자에게 이야기했다. 


'거실에 넓은 침대형 소파를 두면 좋겠어. 주말과 휴일에 자기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으면 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한 손에 들고 소파로 다가가서 자기 배를 베고 눕는 거지. 자기 뱃속 꼬륵 소리도 듣고 발가락으로 장난도 치면서, 창 가득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우리 같이 광합성을 하는 거야. 누워서 당신이랑 주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자기 목소리를 조용히 듣다가 졸음이 오면 잠깐 낮잠도 잘 거야. 아, 그래! 자기가 책을 좋아했으면 좋겠어.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세수하고 예쁜 외출복을 꺼내 입고 밖에 나와서 시간 죽이는 것도 좋아했으면 좋겠고. 아무 일도 없는 따스한 주말 오후에, 서로 손잡고 동네를 거닐면서 산책도 하고, 그러다가 이렇게 서점에 와서 마주 앉아 책도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정말 별 일 없어도,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자기에게 고맙다고, 행복하다고, 사랑한다고 늘 말해줄게.'




아니, 나는 사실 그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에게 서술하던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오래전에 바래지고 버려져서 더는 닿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가 나에게 들려주던 미래 우리 휴일의 일과와,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침실과, 나와 그를 반반씩 닮은 아이와, 그래, 아무리 깊은 감정의 골이 생기고 해소하지 못한 갈등이 남았더라도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굿 나잇 키스는 잊지 말자던. 아, 또 무방비하게 그의 생각이 나버렸다. 그런데,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지난 남자 친구들이 나에게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더는 그들에게 남자로서,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거나 꿈꾸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도 어느새 내 마음속 과거에 자리 잡게 되었나 보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들을 선물했던 사람이지만, 잊고 싶지 않은 꿈과 행복을 알려준 사람이지만, 더는 그의 곁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꿈을 꾸지 않고, 더는 그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거나 미워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이제는 외면하고 모른 체하지 않겠다고. 그저 좋은 기억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기겠다고. 당신이라는 남자를 사랑했고, 당신에게 배운 것들을 잊지 않겠다고. 당신으로 인해 더 나은 내가 되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듯 속으로 말을 삼켰다. 입안이 까끌했다. 창 밖의 햇살은 포근했다.


친구로라도 가끔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고, 식사 한 끼 같이 하고 싶었는데, 이 마음도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그저 고이 접어 넣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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