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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색머리 Jan 07. 2017

스물다섯

뒤 돌아보면 별 것도 아니었는데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했다. 중간에 한 학기 휴학을 했지만 장학금은 입학으로부터 4년까지밖에 나오질 않아서, 기를 쓰고 계절학기를 들으며 한 학기 쉬었던 것을 메웠다. 졸업을 2주 앞두고 정말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지도 교수를 찾아가서 '나 휴학할래'라고 폭탄을 던졌더랬다. 4학년 때 졸업 후 유럽여행을 계획해두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었는데, 지도 교수가 휴학을 얘기하는 나에게, '유럽 가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졸업까지 마지막 2주를 버텨냈다.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었는데 막상 모두 끝마치고 돌이켜보니 그럭저럭 해냈던 것 같다.


졸업식을 마치고,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에서 한 달 정도 일을 더 하고 나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찾아가 짐을 풀어놓고 곧바로 테이트 모던 미술관엘 갔는데, 건물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면서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미술 작가를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아그네스 마틴 이름을 대곤 했는데, 운명적이게도 (그래, 그건 운명이었다) 테이트 모던에서 아그네스 마틴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특별전 마감 불과 며칠 전에 내가 런던에 도착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런던에 머무는 며칠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테이트 모던을 들렀다. 정말 '내가 돈이 엄청 엄청 많았으면 미술관을 통째로 사버릴 텐데' 생각했다.


런던을 시작으로 2달에 걸쳐 유럽 전역을 헤매고 다녔다. 여행 중간쯤 넘어가면서, 렌터카를 몰고 이탈리아 남부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멀쩡한 벽에 차를 들이받았다. 렌터카 중에 가장 싼 자동 기어 자동차를 골라서 빌린 게 벤츠였는데, 사고가 나서 허름한 시골 정비소 차고지 안에 허공에 띄워져 있는 벤츠를 보니,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여행 일정은 모두 틀어졌고, 나는 그 날과 그다음 날 미리 잡아둔 숙소를 환불도 못 받고 취소해야 했으며, 차가 다음날 낮에 수리 될 때까지 이탈리아 남부 작은 해안마을에 하나 남은 호텔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 부품값과 수리비로 800유로에 가까운 돈을 예상하고 마음을 다잡았었는데, 나와 동갑인 아들이 있는 정비소 아저씨는 수리가 끝나고 고작 80유로를 청구했고, 나를 동네 친구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에 초대해서 이탈리아 남부 가정식을 선보였으며 (심지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그 식사에 함께했던 모두가 내 이탈리아 친구들이 되어줬다.


유럽여행이 끝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한국에 잠깐 들렸는데, 아무 생각 없이 낸 이력서로 큰 회사에 얼결에 취직이 되었다. 급히 미국으로 돌아와 회사를 다녔다. 일을 원래 4개월 계약으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6개월을 연장해주고, 또 다시 6개월을 추가로 연장해줬다. 회사생활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돈을 정말 많이 줬다. 책상에 앉아서 졸아도 돈이 나왔고, 빈 회의실에 들어가서 친구와 전화를 해도 돈이 나왔다.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거구나, 생각했다. 두 번째로 계약 연장을 하고 나서 몇 주 후, 회사에서 예산 삭감 명령이 떨어졌다. 당연히 계약직인 내가 가장 먼저 잘렸다. 이미 결제가 끝난 계약 연장은 무효 처리되었다. 내 매니저는 내 눈치를 보며 미안해했다. 나는 물론 속상했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말라며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쉽게 들어온 직장이었고, 오래 일 할 계획도 아니었으며, 회사 나가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 마지막 날, 모든 인수인계를 마치고 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와 여행 계획을 짰다. 마침 방학을 맞은 친구 하나를 꼬셔서 같이 미국 서부 도시들을 쭉 돌아보기로 했다. 회사 다니면서 모아둔 돈으로 아무 걱정 없이 정말 행복하게 여행을 다녔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는 회사에서 같은 팀 팀장이었던 동료가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그 친구가 차린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지분을 받았다. 월급은 없었지만 돈을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다른 일감도 두어 개 들어와서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 포트폴리오에 하나, 둘 내가 한 프로젝트가 늘어났다. 하지만 무언가 일은 계속하는데, 은행 잔고는 점점 줄어갔다.


어느 날, 은행 잔고를 조회해 보니 모아두었던 돈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부모님께 손 벌리기는 싫고 지금 하는 일은 당장 돈이 되지 않는데, 어쩌지, 고민하다가 회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회사를 알아보는데 신입사원 채용 공고 조건이 2년 내지 3년의 경력이었다. 아니, 신입사원이라며? 나는 기껏해야 이제 일 시작한 지 15개월쯤 되었을 뿐이었다. 이력서와 자소서를 써서 공고가 올라오는 회사에 여기저기 넣었다. 답이 돌아오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돈이 없어지자 어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생활이 갑자기 궁핍해졌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편하니 편히 웃지도,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못했다. 포트폴리오를 끊임없이 수정했다. 자소서도 반복해서 읽고 보수했다. 그 와중에도 통장 잔고는 하루하루 줄어갔다.


나중에 취직이 되고 마음이 놓이면 지금을 돌이켜보면서, '별거 아니었네'라고 생각할 텐데 지금의 마음은 도무지 별게 아니지 않다.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미래는 두렵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루는 길고 나는 긴 하루 동안 무언가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당장 다음 달 생활비는 걱정스럽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생활을 책임져 주지 않을 때, 이게 무언가 싶어 멍하니 넋을 놓게 되었다가도, '이거라도 해야지' 생각하게 된다. 어서 빨리 이 터널의 끝이 나와서 지금을 돌이켜보며, '그래, 그럭저럭 해냈네'라고 나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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