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상 속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
인터넷 강의가 도래하고 현장 강의가 맥을 못 추리기 시작할 때, 티브이 보단 핸드폰과 태블릿이 더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 우린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전에 없던 모습으로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이젠 추후에 펼쳐질 변화의 속도나 양상이 놀랍지 않은 지경이다. 불가능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세상은 그 변화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변화 이전의 삶을 들여다볼 때 우린 그것을 향수라고 말한다. 어감을 좀 비틀면 그것을 바로 '도태'라고도 한다. 변화 이전의 삶이 마치 부끄러운 것처럼, 분명 그 시간을 거쳐온 우리가 사라져 가는 티브이처럼 맥을 못 추리게 되듯이 우린 '타고난 현대인'처럼 생활한다. 영화 또한 그 맥락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현대의 시류를 거슬렀을 때 풍기는 매력을 좋아하는 감독이 있다.
내가 본 기예르모 델 토로는 작품으로 그것을 말하는 감독이다. 감독의 두 영화 <판의 미로>와 <셰이프 오브 워터>는 특히나 그런 매력을 풍기는 영화다. 변화와 도태 사이를 오고 가는 스토리와 인물들로 변화 이전과 변화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판의 미로>의 시대적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1944년 시점이다. 과거 역사적 사건이 배경인 시대를 두 인물 '오필리아'와 대위였던 '비달'이 대칭을 이루며 끌어간다.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배치된 정부군을 이끄는 비달 대위는 냉정한 인물이다. 비달이 주둔한 곳으로 만삭인 엄마와 오필리아가 거처를 옮긴다. 그가 있는 곳에서 보호를 받는 듯 하지만 사실 오필리아는 전처럼 편하게 지낼 수가 없다. 비달이 엄마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계속 적응을 못하는 자신에게도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의지할 사람은 엄마뿐이지만 몸이 불편한 엄마마저 오필리아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질 못한다. 그러던 중 숲 속에서 기이한 미로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따라 들어간 곳엔 '판'이라는 요괴가 있었다. 얼굴은 산양처럼 생겼지만 몸은 뻣뻣한 나무 조각처럼 움직이는 생명체였는데, 판은 스스로를 "산이고 숲이자 땅"이라 소개한다. 그리곤 판은 오필리아가 사실은 지하왕국의 '모안나'공주이며 보름달이 뜨기 전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현실에는 비달이 있고 몸이 아픈 엄마가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현실보단 자신이 공주로 있게 될 지하왕국에 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한 오필리아는 판이 제시한 세 가지 임무를 하나씩 해결한다.
낯설고 냉정한 현실 속 오필리아는 '판' 덕분에 또 다른 층위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변화의 지점이라 볼 수 있다. 기존의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 속으로 발을 딛는 것이다.
비달은 시민군을 잡아내는데 혈안이었고, 그들을 도운 사람마저 다 처형하려는 욕망에 빠진다. 점점 더 냉정하게 변해가는 그는, 자신을 통솔하는 정부의 이념을 맹신한다. 어떤 잔혹한 짓을 하든, 타인이 그로 인해 억압 받든, 비달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사회의 이념을 믿고 그것을 올바른 변화라 생각한 비달은 적어도 스스로에겐 정당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오필리아는 판의 주문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판이 경고했던 금기를 어긴다. 그것으로 오필리아를 도우려던 요정 몇이 요괴에게 죽게 된다. 가까스로 두 번째 임무의 상황을 탈출한 오필리아는 현실로 다시 와 엄마를 낫게 할 임무를 수행한다.
오필리아의 세계는 이처럼 두 가지다. 판이 존재하는 세계와 비달이 존재하는 세계. 두 가지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은 유일하게 오필리아뿐이며 두 가지 세계 중 어떤 곳을 선택할지 또한 오필리아에게 달려있다.
극심한 아픔과 냉혹함이 존재하는 현실세계에서 아픈 엄마와 함께 억압받으며 살아갈지, 지금까지 알던 현실과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공주로 존재하게 될 지하 왕국에서 살아갈지.
오필리아의 선택은 마지막 장면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도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독이 어떤 세상을 오필리아의 손에 쥐어주었는지 알 수 없다.
오필리아의 선택을 관객이 단번에 알 수 없게 한 것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필리아는 '판'이 존재하는 왕국으로 변화를 하고 싶어 했던 건 분명하다. 그가 시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니까. 그것을 변화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다 본 후 그 또한 변화를 거부하는 오필리아의 저항이 아니었을까 싶다. 판이 존재하는 동화 같은 세상은 비달의 세계와 반대로 움직이는 낙원이 아니었을까. 비달이 존재한 세계는 너무나 빨리 변해서, 자신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는지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어쩌면 오필리아에겐 너무나 버거운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갈등하던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변화를 따라 잔혹한 현실에 무게를 실을지, 그것을 거부하며 자신의 마음이 이끌리는 동화 속 세상에 발을 딛을지.
동화가 생겨난 건 오필리아의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화를 현실이라고 믿어버린 것 또한 현실이 그만큼 차가웠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겹쳐볼 수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 무엇인가를 놓치고 살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딘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정말 그곳이 맞는지. 어쩌면 우리의 욕망마저 변해버린 건 아닐지. 동화가 필요한 현실이지만 현실을 동화처럼 만들려는 노력은 게을리하고 있는 건 아닐지. 다시 한번 되짚어 볼 때가 계속 올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다.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 나 한 사람에서 그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난 영화 리뷰가 끊임없이 이어지길 바란다. 모양을 바꾸고 형태가 변해도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계속해서 창작되길 바라고, 그것으로 인해 단 한 번의 영향력이라도 타인에게 끼칠 수 있길 바란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다양해서 비슷해질 수 없는 세상이고 그게 우리의 개성이라지만, 같은 작품을 공유할 수 있는 힘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변화는 당연하다. 그렇다면, 당연한 것을 거부하지 않겠다면 우린 그 속도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만들어가야 할까. 누군가는 작품으로 그것을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작품을 보고 또 다른 형태로 그것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늘 변화 속에 있다. 어제보다 더 빠른, 오늘보다 더 몰라볼, 이젠 그저 놀랍지도 않을 세계.
이것이 우리가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