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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Aug 07. 2023

2023 08 07 월

<엘리멘탈> 작은 단위조차 네 가지나 있어.

*영화 스포가 조금 있을 수 있어요*


'다양성'이 주목받고 있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비슷하지 않은 것들을 많이 배척했던 때가 있다. 세상에 무언가 있다는 걸 잘 모를 때. 우리나라 사람들도 눈이

파랗고 머리가 금발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종교는 어떤가. 유일신이 아니라면 전부 우상을 숭배한다고 매도하고 받아들이기야 하지만 서로를 혐오할 재료로 쓰기도 했다. 지금이라고 아주 바뀌었다고 할 순 없겠지.


점점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존재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면서 계급은 평준화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특성들은 다양해졌다. 절대적이라 할 순 없지만 과거에 비해서라면 그렇다.


젠더도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됐고, 언어, 문화, 종교, 직업, 취향 등의 다양성을 외면하고서는 살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 또한 안다. 인정뿐 아니라 존중해야 할 필요도 생겼으며 어떤 다양성은 우리의 인정 따위는 필요치 않은 있는 그대로의 본질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기호와는 정말 상관없이 말이다.



픽사 영화 <엘리멘탈>을 보고 존재란 다양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같은 일을 하는, 심지어 느끼는 감정마저 비슷한 그런 삶은 인간에게 사실 맞지 않는다. 인간은 '동일함'에서 오는 안정감을 즐기는 것 같아도 수일 후엔 여지없이 따분함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따분함을 절대적으로 견딜 수 없는 동물이다.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어떻게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두려움이 좀 더 큰 사람이라 해도 안 해 봤던 것에 대해 설렘을 느끼곤 한다.


영화 <엘리멘탈>은 다양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한다. 일단 두 주인공 '엠버'와 '웨이드'는 각자 불과 물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냥 불 그 자체고 물 그 자체다. 이 둘은 애초에 섞일 수 없는 존재다. 둘이 섞이면 어느 하나는 무조건 사라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닿아서도 안 되고 심지어 가까이 가기에도 두렵다. 이 둘은 성격마저 너무 다르다. 눈물이 많고 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웨이드와 달리 엠버는 불의 속성이 그렇듯 분노 외의 감정은 그다지 느껴본 적이 없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충성이 대단한 아이긴 하지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느끼는 데에는 둔하다.



영화는 이 둘의 너무나 다른 점에 계속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점에도 집중한다. 이 둘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다른 점'이었다. 감정표현에 서툴던 엠버는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고 주변인들과 화합하는 웨이드에게 반했고, 감정을 억누르며 규율대로만 살던 엠버에게 웨이드는 멋진 카리스마를 느꼈다.


달라서 사랑에 빠졌고 이제 둘은 더 이상 달라서 만날 수 없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웨이드는 엠버와 자신이 다른만큼 빛날 수 있으며 그만큼 아름다운 지점도 많이 있음을 자꾸 상기시켜 준다. 결국 웨이드의 노력 끝에 엠버의 마음도 활짝 열리고 둘의 사랑은 이루어진다.


이 부분만 다루고 영화가 끝났다면 적당히 유치하고 재미있는 사랑영화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 다양성은 가족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엄마와 아빠 전부 다 불로서 존재하고 엠버 또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그들의 일을 물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엠버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았고 이는 엠버 가족이 전부 불로서 존재해도 각자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 모두가 개인의 다른 점을 존중해 주고 인정해 줄 때 모두가 성장할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엠버의 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성장한 부모가 되었고, 엠버는 가족 곁을 떠나면서도 가족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웨이드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엠버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경험으로 강인함이 생겼다. 이런 점들이 뭉클했다. '다양성을 존중하자'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감동적으로 풀어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인간은 너무나 많다. 동물까지 더하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이 모든 생명체를 지구가 품고 있다. 하지만 지구는 사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에게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인간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 지구에게 친절하지 않기론 인간만 한 건 없을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심의 목적은 '나와 같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설령 나와 '다르다'해도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영역을 이해해 주고 다양해서 서로를 예쁘게 봐줄 수 있을 때 우린 내적으로 성장한다. 편견과 오해가 조금은 거둬진 사람으로 한 층 더 클 것이라고 본다. 여유로움은 이런 태도에서 나온다. 조급하게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 것, 나를 포함한 타인을 기다려줄 줄 아는 것. 혹은 아니다 싶은 것들은 과감히 끊어낼 줄도 아는 것. 이런 행동은 오래 살피고 깊게 고민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하니까.


각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길 바라고 다수와 동일해지지 않는다 해서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우열이 없고 있다 해도 그 기준은 어차피 내가 아니면 나에게 지울 수 없다. 물론 생계라는 측면으로 이 잣대를 가져간다면 조금 슬퍼지겠지만, 조금 더 성숙한 세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건 맞을 테니까. 조금 더 내면에 힘을 쌓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우린 우리뿐이어서 고유하고 그래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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