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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Oct 29. 2023

룰루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혼돈이 주는 경고, 우린 어떤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세계의 혼돈 너머에 무언가 더.

질서였으면 했고 정답이었으면 했다. 혹은 차라리 신이었으면 했다.

악마가 만든 질서라 해도 나았다.

무질서와 혼돈이 만들어내는 난잡함을 견디기엔 너무 무서웠다. 질서가 없다면 예측은 무의미할 거고, 그렇다면 언제든 불행이 닥쳐도 이상한 삶이란 없고, 꾸준히 행운만 오는 인생도 기이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이해되는 게 싫었다. 불행에도, 행운에도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기가 있고 길 가다 일면식도 없던 범죄자에게 해를 당하는 사람도 있다. 그저 우주가 부여한 본능대로 태어나서 살던 것뿐인데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동물이 있고 그런 동물에게 속절없이 먹히는 동물도 있다. 사회에서 정해준 규율이 그럴싸해 보여 하란대로 공부하고 취업하고 결혼을 했더니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게 어떤 이유에서 나온 게 아니라면, 너무나 DNA로서의 삶, 개인이 아닌 개체로서의 삶을 사는 세포로서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그게 너무 끔찍했다. 그럼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은?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고 티 내고 싶지 않아 때에 따라 연기를 하기도 하고 꼭 슬플 때만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도, 너무 화가 나도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 이 아이러니함은? 이게 그냥 아무 이유도, 아무 질서도 없이 나오는 결과들이라고? 아무도 예측할 수도 없고, 답을 내려한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이라고?

그러니까 원인이 없는 결과가 정말, 있다고?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찾고 찾으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생명체라서’인 것인데, ‘내가 생명체라는 것'의 원인은 뭔데? 아직까진 '그냥'밖에 없는 것 같다. '그냥' 태어났고 '그냥' 사는 거고 '그냥' 도태도 되는 거다. 내 노력의 비중을 늘려보려 했던 때도 있었다. 그것에 가산점을 크게 준 적도 있었다. 아무 질서도 없는 이 무수한 DNA들 속에서 노력이 통하는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아,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려 했었다. 정답의 토막을 찾아낸 것처럼 말이다. 내 노력이 혼돈의 일부를 조금 다듬어 준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노력은 통했다. 공부를 하니 성적이 올랐고 잘 보이려 애를 쓰니 사람의 마음을 얻었고 식단 관리를 하니까 살도 빠졌다.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난 여전히 믿는다. 그런 노력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조금 청소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통하지 않는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도 믿는다. 혹은 그 노력이 그다지 가성비가 높지 않다는 것도 안다. 입시생으로 일 년을 공부했으면 일 년 뒤엔 무언가가 되어있어야 했는데, 일 년 치 공부한 것이 서른이 넘어서 갑자기 관련 없는 곳에 쓰이곤 했고, 식단을 관리한 것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진 것도 아니며 건강은 나빠진 적도 있었다. 이 혼돈 속에서 정갈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들이는 개인의 노력은 양적으로도 충분해야 하고 질적으로도 어긋나선 안 된다. 아주 미묘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건드려야 그나마 최선에 가까운 결과가 나온다. 개인의 노력은 그런 것이다. 심지어 여러 제도가 뒷받침이 된, 과거 몇 십 년 전보다는 훨씬 좋아진 배경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인데도 결과를 얻기까진 그 가치에 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그리고, 반드시 잃는 것이 생긴다.


이런 게 세상이고 삶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지는 꽤 됐으나 여전히 답답한 부분은 있다. 지루하지 않기 위해선 부단히 마음을 다듬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부덕함은 '지루함을 잘 느끼는 것'인 것 같은데, 개인의 노력에도 지루함은 찾아오고 뚜렷한 성과에도 내성은 반드시 생긴다. 그렇게 사랑한다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도 지루함은 여지없이 오고 반복되는 일상에 매번 감사함과 안온함을 느끼기 위해선 '기도'나 '명상'이나 '독서' '사색' '합리화' '무던함' 등의 여러 노력이 또 필요하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책으로, 룰루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완독 했다. 내가 요즘 하던 생각과 너무 비슷한 내용의 책이어서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역시 누구나 이런 생각은 한 번쯤 품어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약간 위안도 됐다.


책은 너무 재밌었다. 전개 방식이 너무 흥미로웠고 번역문이지만 문장 자체도 어렵지 않고 수려했다. 약간의 반전을 노린 것 같은 플롯도 재밌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읽어 이틀 만에 완독 했다.

많은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여전히 내 혼란스러운 생각을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괜찮았다. 책에서 해답을 찾길 바라는 마음도 어릴 적 지워버렸다.


너무나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지만 의아한 부분도 있었다. '분류'라는 게 정말 인간이 자신들을 독보적이고 유일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서, 즉, '위계'를 설정해놓고 싶어서 하는 걸까? 정말 그 이유뿐일까?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꼭 '위계'설정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분류와 명명은 이 세상에서 없을 순 없는 조건들이 아닐까 싶었으니까. 인간은 자기들끼리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는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으며 언어가 생기는 순간 분류와 명명은 아예 피할 수가 없다. 어쩌면 다른 동물들도 자신들만의 언어로 무언가를 분류하고 명명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언어가 없다한들 무언가를 식별할 때, 분류가 없이 식별은 불가능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건 전부 '생존'을 위해서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존 본능'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럼 왜 우주는 우리에게 생존본능을 부여한 걸까? 인간이 인식한 도덕관념과는 맞지 않고, 분류가 그저 위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윤리와는 멀어지는 길일 텐데?

그러니, 우주는 우리와 친하지 않다는 거다. 우주는 혼돈으로 가득하고 우주에는 인간의 질서 따윈 없다고.

이 책의 저자가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 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 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과연 네가 토양 속에서 환기를 시킬 수 있을까? 목재를 갉아먹어 분해의 속도를 높이는 일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네가 그러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런 면에서 지구에게 넌 개미 한 마리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내 생각에 쉼표를 찍어주는 문장 같았다. 자주 하던 생각에 누군가 동조를 해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반갑고 서늘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의 입장에서 미물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지구와 환경을 해치는 인물들이니, 심지어 우주 입장에선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다른 생명체보다 더 고등하다고 깝죽대는 인물들이니, 없어져야 마땅할까? 자기들끼리 규칙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도덕적 감정을 세뇌시켜 이 세상의 시스템을 굴려가는 건 정말 무의미한 일일까? 어차피 죽으면 끝이고 고귀하게 살다 죽어봤자 흙의 일부로 돌아가고, 우주 속 먼지처럼 부유하다 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을 'DNA'들이니까?


혹은 인간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유일한 것들을 해내며 자축하며 서로를 경외하고 배려하는 일은? 그것도 우스운 일일까? 그럼 개미들은? 어차피 인간이 검지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면 그뿐인 삶을 열심히 협력하고 냄새길을 만들며 음식을 나르는 것으로 꾸려왔던 그 개미들은? 하루만 살고 끝나버릴 하루살이 날파리들은? 뭐 때문에 하루동안 그렇게 많은 날갯짓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나. 하루살이나 개미입장에선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자축할 수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또 뿌렸다. 이토록 억눌리지 않는 불굴의 끈기는 어쩌면 아름다운 것인지도 ㅗ른다. 따지고 보면 그건 미친 짓이 ㅏ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선에 대한 믿음을, 별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가슴속에는 존재하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조용히 실행에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신뢰 비슷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 차가운 물이 흩뿌려지는 빛 속에서, 48시간 이상 틀어놓은 수도꼭지는 누가 봐도 위풍당당해 보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난 이런 부분에선, '그래, 인간도 세상의 혼돈 속에서 규칙을 만들며 사는 거지. 아무리 혼돈의 힘이 압도적이고 혼돈이 우리를 건드릴 때마다 그것에 굴복할 수밖에 없어도 문명을 만들고 전통을 만들고 혁신을 만들어 그 혼돈에 맞서려고 발버둥 쳐 온 것도 인간이지. 인간이 인류에게 헌신할지언정, 적어도 세상의 혼돈에 헌신한 건 아니니까. 굳이 따지자면 인간은 인류의 편으로 살다가 죽는 거니까. 그게 세상의 혼돈에 섞여 들어가는 것보단 조금 더 가치 있고 뿌듯한 일이 아닐까. 조금 더 숭고한 희생이 아닐까. 내 개인을 위한 세상을 만들 순 없다 해도 적어도 인류에는 기여를 한 것이니 그것에서 만족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중략>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 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중력>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그러다 또 이런 부분을 보면 다시금 김이 빠졌다.

'그래, 생명은 무력하지. 항상 압도당하기 바쁘지. 그럼에도 그것에 맞서 의미와 질서를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법칙 자체가, 의미를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그 시도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근데 그 자체를 의미 있어하는 건 인간의 시선에서 인 거지? 인간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걸 '의미'라고 생각을 안 할 수 있지? 아무도 관심 없겠지? 그럼 인간은 항상 인간사이에서만 인정과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희열이라도 유지되기 위해서 인간은, 즉, 인류는 계속 번성하고 계속 무언가를 착취하며 어쩔 수 없이 '가해'의 입장을 지켜나가야겠지?'

라고, 또,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

장엄함은 존재해. 네가 그걸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자신이 쓴 단어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철퍼덕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를.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지닌 위험한 힘에  대해서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


그렇다면, 인류 속에서 소외되는 인간은 없을까? 인류의 질서가 인류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면, 그 의미에서 제외된 인간은 없을까? 생각하던 중 나오게 된 이 책의 반전은 머리를 한 대 때려버렸다. 반전은 여기서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그런 반전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다시금 숙제가 많아진 느낌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던 반전이었고 그 반전이 또 다른 반전으로 이어지며, 사실은 우리가 그 반전 속에서 문명을 만들어 오기도 했겠다는 생각에 오싹해졌다.


물론 난 이 책이 무언가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그것에 답을 내려고 노력을 할 뿐 단 하나의 바뀌지 않는 정답이라고 내놓을 순 없을 거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반하고 싶었으나 매섭게 돌아설 수밖에 없던 '인류'의 번영 과정 속에서 오히려 길을 더 헤맬 뿐, 명확히 마음에 드는 해답은 없었다.


난 계속 모르겠다. 이젠 무얼 바라는 지도 잘 모르겠다. 답이 있길 바라지도, 이대로 계속 없길 바라지도, 답이 사실은 있는데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난 그냥 살 것 같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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