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자 Oct 10. 2024

가난 혐오

가 아닌 가난한 '자' 혐오

가끔 유튜브로 예전 시트콤을 한 편씩 틀어놓고 잠들 때가 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와 하이킥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좋아한다. 시트콤이 방영했을 당시 어떤 마음으로 시청했는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볼 때마다 이상하게 포근하다. 이유를 모르는 그런 편안함이 좋아서 가끔 그것들을 찾게 된다.


며칠 전 지붕 뚫고 하이킥을 봤다. 극 중 '신애'역을 맡은 서신애배우가 중심이 된 에피소드였다. 초등학생인 신애는 언니와 함께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살며, 빚쟁이들 때문에 헤어진 아빠를 기다린다. 두 자매의 사정이 딱해 부잣집 할아버지가 그들을 거둬주기로 했는데 소액의 월급을 받고 그 집의 입주가정부 일을 한다면, 그 집 방 한 칸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신 거다. 오갈 데 없던 자매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다 아직 초등학생인 신애가 자기도 친구를 집에 데려오고 싶다며 언니에게 조르는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언니는 그 집이 자신들의 집도 아니고 자신들은 얹혀사는 입장이기에 마음대로 친구를 데려와선 안 된다며 거절한다. 신애는 어린 마음에 서럽기도 하고 자신들의 이런 처지가 답답하기도 했는지 그때부터 언니한테 심술을 부린다. 언니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동생의 심술을 어떻게든 참고 넘기려 한다.


유튜브로 본 영상이었다. 댓글을 봤다. 신애에 대한 욕이 어마무시했다.

'얹혀사는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다.'

'초등학생이면 알 거 다 아는데 너무 철이 없다.'

'원래 가난하면 분수를 알아야 한다. 바라는 게 있어선 안 된다.'

'자기가 뭔데 저런 걸 요구하나. 지가 뭐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아나.'

등등.


예상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생각하진 않았으면 싶었다. 당연히 얹혀사는 입장이니까 친구까지 데려오는 건 안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사람들 반응이 예상보다 더 가혹했다. 심지어 극 중 신애와 동갑인 부잣집 손녀였던 해리에 대한 칭찬은 심심치 않게 보였다. 사실 해리 캐릭터가 성격도 더 괴팍하고 폭언과 폭력 모욕까지 매일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말이다. 중반부까진 해리라는 캐릭터를 칭찬할 거리가 단 한 개도 없는데 (후반부로 가면 해리도 성장을 하니 그건 논외로 치고.) 어떻게 신애보다 해리가 더 칭찬을 받고 신애가 더 욕을 먹는 거지?


신기했다. 어쩌면 흥미로웠던 것 같다. 사람들의 어떤 마음이 이런 생각을 주도하고 있는가. 그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기에 이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건가. 이유를 더 알고 싶었다. 그냥 단순한 가난혐오로 보기엔 피상적이었다. 가난이 싫으면 가난 자체를 혐오하면 될 일이니까. 가난에 처한 사람까지 혐오하고 나아가서는 아예 잘못을 저지르는 캐릭터보다 가난한 캐릭터를 더 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부터 이런 생각을 종종 이어왔다. 관련 텍스트를 보거나 시간이 남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왜 가난하고 비어 보이고 초라하고 비참한 사람을 싫어할까. 그냥 가난이 싫어서 곁에 있기 싫은 정도로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사람을 폄하하고 능욕하고 모욕하고 싶어 한다. 가난은 모두 개인의 탓이고 개인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면서. 심지어 아직 어린 아이들한테마저 가난은 '그 아이의 잘못'인 것처럼 매도하고 싶어 한다. 그 아이를 욕하면서도 그 아이의 인생이나 서사에 대해서 적어도 고민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고민 없이 던지는 욕이 우리에겐 가장 값싼 쾌락이라 그런 것일까.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모두 '음침하다'라고 까지 생각한다. 돈이 많고 여유로운 사람들은 모두 해맑고 성격은 괴팍할지라도 속은 여리고 겁이 많은, 그러니까 알고 보면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음흉하고 음침하고 영악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게 가난과 직결되는 결론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가난하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든 건 맞다. 하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나 경험해 보고 싶은 것에 제한이 생기니까 그걸 이루기 위해선 조금 더 노력을 하거나 조금 더 옳지 못한 방식으로 달성하려 하는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러려면 음침해질 수도 있고 영악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수할 수 있는 것 또한 특권이다. 어떤 가난한 자의 삶은 고단하다. 순수할 여유가 없다. 어쩌면 고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정신없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다. 혹은 가난해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버티며 사는 사람도 있을 거다. (아니면 삶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어찌 됐든 난 가난한 자의 삶의 방식을 음침하다기 보단 '처절하다'라고 본다. 그들은 처절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사회 시스템 자체가 그렇다. 시대가 많이 변해서 물론 여러 복지도 있고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게끔 꾸려진 사회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계급은 존재한다. 그 계급은 항상 나뉘어 있어야 모두가 안도한다. 그러니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시스템이 훌륭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처절할 수밖에 없다. 그들 또한 욕구를 타고났고 처절하게 살지 않으면 욕구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종교인 말곤  없을 거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이 처절하게 얻으려 하는 욕구는 그저 기본적인 욕구인 경우도 많다. (음침한 그들에게 속지 않기를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내 선에서 다루어내야 할 일인 것이고.)


가난을 옹호하고 싶진 않다. 가난은 옹호의 대상도 폄하의 대상도 아니다. 그저 나는 처하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현상일 뿐이다. 다 떠나서 극 중 폭력과 폭언, 모욕을 일삼는 해리보다 얹혀사는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고 싶어 하는 신애가 더 욕을 먹는 이유. 정말 사람들은 각자 마음속에 가진 그 이유가 곤궁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본인 스스로 가난에 물들'까봐' 그게 두려워 가난한 '자'를 '혐오'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마치 나는 그 세계와는 아예 접점이 없는 양. 평생 모르고 살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 양 말이다. (그건 죽기 직전까지 살아봐야 안다.)


그런데 좀 무서웠던 건, 나도 그런 댓글을 보다 보니 순간 신애가 얄미워 보였다. 가뜩이나 연기도 잘해서 더 극에 몰입이 잘 됐던 것도 사실이다. 자기 집도 아닌데 친구를 데려오면 안 되지. 하는 마음까지였으면 좋았을 걸, 폭력을 행한 해리보다 신애가 더 싫어지는 건 사실 알맞지 않은 마음의 방향이다. 물론 사람 마음이 항상 논리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맞지 않는 마음이라면, 한 번쯤은 일부러라도 교정해 보려고 시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방향 또한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그리고 좀 안타까운 건, 신애를 욕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해리 같이 부유한 입장에 있는 것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었다. 신애입장에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해리 입장에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장 많은 대중층은 그저 그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있는 자들일 거다. 대부분의 대중이 그곳에 있다. 부자와 빈자 사이 그쯤 어딘가. 둘의 간극을 열심히 메꿔주며 어떻게든 부자층으로 가기만 바라는 사람들. 세상에 가장 많이 있는 부류다. 스스로를 가장 무해하고 선하다고 여기는 부류들. 크게 나쁘지도 크게 도덕적이도, 그렇다고 크게 혐오스럽지도 않지만 그걸 뛰어넘는 선함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확신하는 부류들. 대중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가장 크게 저지르는 실수가 이것이다.


아마 그 대중은 해리 같은 부유함을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신애 같은 가난한 아이가 무언가를 바란다는 건 동시에 짜증이 났나 보다. 어떻게든 부유한 자를 추켜세워야 본인 또한 부유함의 대열에 궤를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인지. 아님 적어도 가난만 피하면(전염되지 않으면) 장땡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각각의 마음은 확신할 수 없다.


가난이 싫고 피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가난한 '자'를 혐오해도 되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본능적으로 짜증이 솟구쳐도 타인이 내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인간은 다른 인간을 혐오할 권리조차 없기 때문에 한 번쯤 내가 왜 그런 마음을 갖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저 인물이 왜 싫은가. 나는 왜 극 중 신애를 싫어하는 걸 넘어서 신애 역을 맡은 '서신애'배우까지 혐오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왜 가난한 자를 보면 다른 이유보다도 일단 저들은 게으르고 무식해서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가.' 정답은 없다. 가난이 누군가에겐 개인의 탓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극 중에선 가난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엔 신애는 너무 어리다.


간혹 배우의 외모나 표정까지 욕하는 댓글도 있었다.

어쩔 땐 정말 인간이 싫다.


웃긴 건 저렇게 댓글을 썼던 사람들 중에는 피해를 입거나 학대를 받은 아이 또는 드라마에서 피해 입장에 처한 사람한텐 한없이 관대해지는 사람도 있다는 거다. 도무지 같은 사람들이 댓글을 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쩔 땐 가난한 자를 혐오하다가도 또 어쩔 땐 가난한 자(서사가 충분히 나와서 우리를 감명시키는)에게 쉽게 동감하고 관대해진다.

그러니 우리의 저런 잣대가 굳건한 논리위에 세워졌다기보다 순간의 감정에 의한 혹은 두려움에서 기인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양측의  댓글을 모두 같은 사람이 썼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상 두 개에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른 경우가 있다.)


우린 언제든 부유해질 수도  있고 언제든 가난해질 수도 있다. 예고 없이 태어났고 예고 없이 죽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구축한 시스템은 너무 공고하고 그보다 자연은 더 공고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아주 무력하게 한 마리 개미만도 못하게 살아가는 것이 생명체다. 그 생명체 중 하나가 인간인 것이고. 개인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개인의 노력은 엄청나게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노력이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과 별개로 우주의 입장에서 우린 미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린 언제든 살고 언제든 죽고 언제든 부유하고 언제든 가난해질 수 있다.

우주입장에선 우리 모두가 경중이 같은 생명체이니 우리  모두를 위해 법이 있고 복지가 있고 규율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언제든 어떤 입장에든 처할지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니까. 오늘 수십억을 만지다가도 몇 달 만에 건강을 포함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니까. 그걸 최소화하기 위해 개인의 노력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도  본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은 법과 타인의 배려로 보호받아야 한다.

왜? 우리 모두 언제든 그런 입장이 될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니까.


남자친구와 하는 대화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대화가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가 많아지고 진지해지는 걸 꺼려하게 된 건 '두려워서'인 것 같다고. 난 그런 악플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연약할 수 있다는 걸 '정말로' 인정하면 조금 덜 두려울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