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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nnun Aug 29. 2020

아홉살 생일

지난 토요일은 너의 아홉 번째 생일이었지.


집을 떠나 맞이하는 두 번째 생일이구나. 매년 생일마다 니가 정해주는 주제로 케이크를 만들곤 했었는데, 이번 생일에는 화단에 피어있는 들꽃으로 케이크를 꾸몄다. 아홉 살, 너는 이제 더 이상 케이크에는 관심 없는 나이가 된 걸까.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한 곳에서 한 달 이상을 머문 적이 없었는데, 이 깊은 산속에 들어와 지낸지도 벌써 세 달째다. 머물러 있는 시간에도 너는 어김없이 자라서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졌어.


네 또래의 친구들은 없었지만 이곳 커피농장에서 일하는 분들과 농장 주인아저씨 부부를 초대해서 피자도 굽고, 생일 축하 노래도 다 같이 불렀지. 같은 스페인어를 쓰는데도 아르헨티나와 파나마의 생일 축하 노래는 멜로디만 똑같지 가사는 조금 달랐다. 덕분에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생일 노래가 화음처럼 들렸지.


너는 부끄러운 듯 단호한 얼굴로 손님들에게 물었다. 여기 파나마에는 생일 케이크에 얼굴을 밀어버리는 풍습은 없겠지요? 작년 생일날, 에콰도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너는 부르르 떨며 분노했지. 생일 노래가 끝나고 촛불을 껐을 때 한 아이가 뒤통수를 밀어버린 바람에 얼굴에 크림이 잔뜩 묻었었잖아. 그때 그일 때문인가, 네가 더 이상 케이크에 관심이 없는 것이.


농장 주인아주머니는 너의 생일파티를 위해 피냐타(La Piñata)를 준비해 놓으셨다. 두꺼운 종이로 된 상자를 매달아 놓고 막대기로 두들겨 패서 그 안에 있는 사탕이며 과자들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게임이었지. 아이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서로 많이 주워 담으려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엄마는 네 생일에 한 번도 그 게임을 준비해주지 않았었어. 넌 매년 원했는데도 말이야.


아나 아주머니가 준비해 놓으신 덕분에 모두들 깔깔 웃으며 게임을 즐겼지. 눈을 가리고 허공에다 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우스워서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이윽고 쏟아진 엄청난 양의 사탕을 주머니 가득 담은 너는 나를 쳐다보며 해벌쭉 입을 크게 벌려 보였다. 이가 썩을까 봐 사탕도 못 먹게 하는 엄마가 그동안 얄미웠겠지. 그래, 생일이니 크게 봐준다. 마음껏 드셔!


올해 너의 생일은 멕시코쯤에서 맞게 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파나마에 머물고 있다. 언제쯤 국경이 열리고 움직일 수 있게 될까. 우리는 여행을 계속하게 될까.


지난 일 년 반 동안의 여행은 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이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보다 너의 인생에 어떤 영향으로 기록될지가 더 궁금하다. 엄마인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홉 살의 너에게, 열 살의 너에게, 앞으로의 너에게 이 여행이 어떻게 기억될지 나는 그것이 궁금해 미치겠다.


네가 가장 너답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며 사는 삶이 너의 영혼을 언제나 지상에서 한 뼘쯤 둥둥 떠있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 붙밖혀 있는 것들을 소유하려 안간힘을 쓰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도토리가 떼구루루 구르며 까르르 웃는 것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이 여행이, 뿌리를 거두고 사는 이런 삶이 불안을 낳지 않을까, 선한 모습으로 가득해야 할 세상의 민낯을 보고 어린 네가 너무 일찍 실망하지 않을까, 그래서 너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두려워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엄마인 나의 몫이다.


너는 그저 빨리 잊어야 하는 것은 빨리 잊고, 내일은 또 어떤 도토리로 굴러다니며 깔깔거려볼까 그것만 궁리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이미 너는, 보고도 모르는 척, 알면서도 관심 없는 척할 줄 아는 아이다.

엄마가 몸이 피곤하다고 흘리는 말을 귀담아듣고 아빠에게 조언을 할 줄도 아는 아이다.

동생이 귀찮게 하는 게 너무 싫지만, 자는 모습을 보며 너무 귀엽지 않냐고 뺨을 부비는 아이다.

일주일이나 지난 오늘, 생일파티를 정성껏 준비해주어서 고마웠다고 편지를 쓰는 기특한 마음을 가진 아이다.


아홉 살, 아름다운 나이

성숙하지 않아도 된다. 웃자라지 않아도 된다. 너무 큰 마음을 부러 갖지 않아도 된다.

아직은 호기심만 가득해도 되는 나이다. 이 세상은 왜 이러냐고 많이 물어보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가냐고 질문하렴. 그리고 모든 것을 만지고 냄새 맡거라.


한평생 진지하고 재미없게만 살아온 이 엄마는 너에게서 인생을 배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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