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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nnun Sep 04. 2020

에콰도르에서의 어떤 선택

Ecuador, Border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에콰도르에서 마지막 글을 브런치에 올리고 난 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작년 10월의 에콰도르는 내전과도 같은 사회 갈등을 겪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정부가 경유에 대한 보조금을 끊겠다고 발표한 직후 전 국민이 파업에 들어갔고, 전국의 고속도로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가 있던 지역은 에콰도르 내에서도 특히 원주민 혈통 사람들의 조직력과 권력이 강했던 곳이어서 시위대의 성격이 더욱 강경했다. 당시 에콰도르에 있던 많은 여행자들은 각자 자기가 있던 곳에서 몸을 사리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도 열흘 정도 여론을 살피며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전망이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그러한 갈등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 예상했다.


배낭여행을 하던 외국인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탈출을 시도했고, 그나마 국경 가까이 있던 여행자들은 콜롬비아나 이웃나라 페루로 속속 이동했다. 외국인들의 국경 넘는 것을 돕는 전문 브로커가 생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국적 시위가 장기화되고 시위대들이 물류 유통을 전면 차단했기 때문에 작은 마을들의 슈퍼마켓들은 점점 비어갔다. 수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우리는 결국 국경을 넘기로 결단을 했다.


콜롬비아까지는 400킬로미터 정도 남아 있었지만 국경까지 가려면 수많은 시위대를 뚫어야 했다. 시위대들은 고속도로 곳곳을 점거해 시민들의 이동을 막고 있었다. 통나무를 잘라 길을 막고 불을 피웠으며 복면을 쓰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곤 했다.


시위대가 점거한 곳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우리는 일단 시위대가 있는 곳까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을 설득하는 전략을 택했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과 모두 내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찾아들어갔는데, 막상 그곳에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 모두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면을 쓰고 창을 들고 겁을 주기 위해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차에 남아 있던 음료수와 과자를 나눠주었다. 과자를 건네받은 사람이 쓰고 있던 복면을 들어 올릴 때면 열여섯, 열일곱쯤의 앳된 얼굴이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기름값이 세 배 이상 비상식적으로 오르게 된 상황에서 이 정도의 시위도 하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시위대 사람들에게 지나갈 수 없다면 그들과 그곳에서 지내면서 함께 시위하겠다고 말했다. (돌아갈 곳도 없던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지나갈 수 없다고 버티던 그들도 아이들과 함께 여행 중인 외국인들이 그 상황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 않은 틈을 타서 우리 캠핑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화적으로 길을 점거하는 곳들도 많았지만, 험악한 곳도 더러 있었다. 아르치도나(Archidona)라는 마을의 시위대는 멀리서 보기에도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솟아오르는 연기의 양이 어마어마했고, 간간히 공포탄을 쏘아대는 소리까지 들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을 지나겠다고 줄을 선 차들의 행렬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가 내렸다. 여차하면 재빠르게 운전을 해서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남편은 운전석을 비울 수가 없었고, 아이들이 차에 타고 있으니 내가 혼자 내리는 편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시위대의 자세한 상황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시위대들보다 인원이 눈에 띄게 많았고, 사람들의 절반은 술에 취해 있는 듯했다. 내가 다가가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사람들이 모기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지나가고 싶으면 돈을 내라고 소리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굶어 죽게 생겼다면서.


시위대의 앞쪽에는 모래와 자갈이 몇 미터쯤 쌓여있고 그 주위로 고무 타이어가 심한 연기를 내며 불타고 있었다. 지나가라고 한들 캠핑버스가 그곳을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마침, 소방차가 요란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소방차가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삽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십 달러짜리 지폐를 잽싸게 꺼내 리더처럼 보이는 한 중년 남자에게 쥐어주었다. 우리도 지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속삭이면서.


남자는 빨리 지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상황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미친 듯이 손을 휘둘렀다. 빨리 와!


삽을 든 남자들이 타이어와 자갈을 걷어낸 틈으로 소방차가 황급히 앞장섰다. 우리 캠핑버스는 덩치가 커서 자갈을 올라타고 바퀴가 몇 번 헛도는 일을 겪고 나서야 겨우 그곳을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차 옆구리에 손을 대고 있는 힘껏 밀었다. 제발 좀 지나가 주라.


캠핑버스가 꾸역꾸역 자갈더미를 넘어가자 삽을 든 사람들이 다시 달려들어 길을 막았다. 우리는 그날 그 시위대를 통과한 몇 안 되는 차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크고 작은 시위대들을 아홉 군데 지났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이동한 데다 시위대를 상대하면서 너무나도 긴장한 탓에 국경에 닿자마자 남편과 나는 부퉁 켜 안고 울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물론 시위대가 게릴라나 범죄자들처럼 폭력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행한 일이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일을 겪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처럼 시위대를 넘어가다가 해코지를 당한 여행자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위험을 감수하고 국경을 넘은 것은, 에콰도르에 남아 있는 것이 장기화된 갈등 상황 속에서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한 가지 바람뿐이었다.


그동안 장밋빛으로 빛나던 여행이 환상과 낭만을 걷어내고 알몸을 드러내기 시작한 첫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에콰도르를 성공적으로 탈출한 직후까지만 해도 그것이 낭만적 모험의 한 챕터일 뿐이라고 여겼다.


우리의 선택이, 악행을 전제하지 않는 선택이라면,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선택은 적어도 우리를 악몽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네 식구의 여권에 콜롬비아 입국 도장이 쾅쾅 찍혔을 때, 그리도 기뻤던 것은 우리의 선택과 용기가 두 아이들을 그곳에서 구해냈다는 성취감과 안도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언제나 선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니다.(이 후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어려움을 맞닥뜨릴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여행의 일부분으로 귀결될 그런 종류의 어려움, 그 난관들을 극복하고 어쨌든 이 여행을 이루었노라고 외치는 나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떤 난관들은, 여행 자체를 마구잡이로 잘려나간 아무 의미도 없는 천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여행이 우리를 배신할 때, 너무 아프고 불안해서 그냥 도망쳐 버리듯 증발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 수도 있다는 것을, 일 년이 넘는 여행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행이 나의 영혼에게 진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시 브런치에 글을 쓰기까지 열 달 가까운 시간이 걸린 이유는,


나의 여행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고하기 위한 용기를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행이 내 연약함의 실험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고문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진흙탕에서 언제 완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밝힌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한 여행이 낮과 이성의 세계와 밤과 무의식의 세계의 경계를 잔인하게 흔들어 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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