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편하게 하는 고백이지만, 콜롬비아 사건 이후 몇 달 동안은 아이들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불행이 닥치면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분노를 했고, 그다음엔 자책을 했고, 후회를 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세상 전체를 향한) 다소 확장된 느낌의 화가 치솟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무서워졌다. 산속으로 향하는 길만 봐도, 흐르는 물만 봐도 발작이라도 할 듯 가슴이 뛰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잡고 싶었다.
집중만 잘하면 엉켜버린 듯한 실타래를 풀어내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금방 갈아놓은 날 선 부엌칼 같은 마음속에선 매일 저울질이 벌어졌다. 저울의 한쪽엔 그동안 여행하면서 행복했던 순간들, 우리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황홀한 풍경들이 놓였고, 다른 쪽에는 '그 일'이 인정사정없이 올라탔다. 까만 복면을 쓰고 성수라도 뿌리듯 총을 흔들어대던 강도가 저울 위로 철퍼덕 오를 때면 여지없이 저울은 불행 쪽으로 기울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차곡차곡 쌓아왔던 세상에 대한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는 생각에 한없이 서글펐고, 아무리 좋은 것을 저울에 올린다 한들 덩치 큰 불행과 맞짱을 뜨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번의 불행은, 그렇듯 백가지 천 가지의 행복한 순간들에 가볍게 똥칠을 해버리는 대단한 위력이 있었다.
한국을 떠나 홀로 비행기에 오를 때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빈민촌을 헤집고 다닐 때도, 벌건 대낮에 대로에서 강도에게 질질 끌려갔을 때도, 난 금방 무덤덤함을 되찾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내 한 몸 건사하며 살던 때와 엄마가 된 지금의 책임감은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불행을 맞닥뜨리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먼저 하는가.
만약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말았더라면, 굳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한 가지라도 어긋났다면 불행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경우의 수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불행과 평안을 저울질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행복들을 올려놓아본들 큰 불행 한방이면 균형은 쉽게 깨지고 만다. 내가 지난 열 달 동안 내내 저울질을 하며 괴로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과 나란히해서 당위를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여행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여행의 좋은 점들을 긁어모아도 계속 이 여행을 해야 할 정당성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 가자, 아르헨티나 집으로 돌아가자, 그도 저도 안되면 그냥 여기 눌러앉자.
움직이는 것만 빼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모르는 곳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모르는 음식들을 먹는 일들이, 그렇게나 내가 사랑하던 일들이, 점점 두려워졌다.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의 인생과 엮여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내포하는 위험성들이 이제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만에 하나 아이들에게 티 끝만큼의 나쁜 일이라도 더 생기다면 죄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겨 평생 피를 흘리며 살아가야 하리라. 아이들은 이 여행을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여행을 하던 중이 아니었다면. 아르헨티나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어떤 불행을 겪은 것이라면 어땠을까. 불행은, 괜히 여행을 떠나서, 괜히 배를 타서, 괜히 그 자리에 들어가서, 괜히 고집을 피워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그냥 지나가는 행인과 부딪히듯 인과 없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원인을 찾고, 죄인을 찾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우리 삶에서 불행이란 이유도 없이, 그다지 잘못한 것도 없이 슬그머니 찾아올 때도 있다는 사실, 그 생각을 딛고 마음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우리는 여행에서 건진 삐까번쩍한 경험들을 내보이는 것에 익숙하다.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 행복한 순간을 포착한 운 좋은 사진들, 그런 것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여행에서 얻은 불행한 경험들을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이유는 그 사건을 자초한 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굳이 돈을 들여서, 굳이 시간을 들여서 여행을 떠난 것은 바로 나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짐을 싸서 위험한 집 밖으로 나갈 것을 종용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여행에서 일어난 모든 불상사들은 굳이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 똥을 싸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해본들, 그러니까 왜, 굳이, 그런 곳에, 이런 상황에, 여행을, 갔느냐는 말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지만, 여행에서 벌어진 그 진저리 나는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시키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불행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나처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여행에서 난장판이 벌어진 경우라면, 주변의 비난은 더 잔인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이런 경우 돌파구는 간단하다. 나 자신을 자책하면 되니까)
그러나 꼭 맞는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불행이 얼마나 될까. 그 불행을 겪을 이유가 없는데도,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죄를 짓고 산 것이 아닌데도, 원하지 않는 시기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덩치의 불행이 불쑥 인생에 끼어드는 경우가 어쩌면 더 많지 않은가.
여행과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는 달려들어 씹어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썩은 생선인지 맛난 살코기인지 결코 알 길이 없다. 최선을 다해 냄새를 맡으며 신중하게 선택을 이어가며 살고 있는데도 순식간에 내 삶을 망쳐버리는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냔 말이다.
머릿속에서는 기억장치라는 것이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어떤 사건을 반추한다. 혹시 불행이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언제까지나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무엇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도저히 평행을 맞출 수 없는 저울질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망할 놈의 불행을 뚜껑 달린 드럼통에 집어넣고, 무거우니 그냥 아무 데나 내려놓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우직함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닐까.
복면강도는 이미 사라졌고 나에게는 '상처'라고 불릴 수도 있는 감정만이 남아 있다. 이 감정을 내내 마음에 지고 갈 것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후안과 함께 강도를 쫓아갔던 두 명의 경찰 외에도 폭포에는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 청년은 차만(Chaman)이라고 불리는 샤먼, 일종의 주술사 같은 사람이었다. 두 경찰 아저씨들은 그 주술사와 함께 근처에서 열린 영성수련회에 참여하던 중이었다.
후안이 총을 들고 강도를 뒤쫓고 이어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던 그 아수라장 같던 순간에 주술사 청년은 큰 바위 위에 올라가 한 손을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쳐대고 있었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물속에서 최대한 몸을 엎드려며 숨어 있던 그때에도 그 청년은 사방이 뚫려 있는 바위 위에 꼿꼿이 서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기도를 하던 청년은 어느 순간 바위에서 내려와 나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내 손을 힘껏 잡아 주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여러 사람들 중에 왜 유독 나에게 다가와 그 말을 해주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그 시트콤 같은 장면을 나는 두고두고 곱씹었다. 폭포와 권총강도, 주술사와 수련회, 경찰들, 그리고 우리들.
아무리 생각해도 연관성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낼 수 없는 기표들이 한날 한 장소에 모여 총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오케스트라를 감상했다니. 곱씹어 생각해봐도 뜬금없는 예술영화의 한 장면 같이 느껴진다. 정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충분했을 그날.
산을 내려오면서 주술사 청년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영성수련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날 아침, 수련회를 이끌던 스승님이 갑자기 청년과 경찰 두 명을 지목하고는 세 사람은 특별히 폭포로 내려가서 영혼을 씻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들은 수련회 프로그램과 전혀 상관도 없는 지시를 받고 폭포로 내려왔다가 강도를 맞닥뜨렸고, 멘탈 붕괴를 겪고 있는 동양인 여자와 그녀의 두 어린아이들을 정성을 다해 호위해서 산을 내려오도록 도왔다.
불안이 턱까지 차올라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바위 위에서 한 손을 휘두르며 기도를 중얼거리던 청년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듯 여행은, 그리고 삶은
치떨리는 불행 속에 개떡 같은 유머를 끼워 넣는, 얄미운 이야기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