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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Dec 26. 2022

[부여] 정림사지와 박물관

현장에서 온전히 느껴지는 백제시절의 흔적

부소산성에서 내려온 후 정림사지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은 했으나 울타리가 둘러져 있어서 입구를 찾기 위해 돌아가야 했다. 그러면서 내부 공간이 꽤 넓다는 걸 예감했고 돌담을 따라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학창 시절,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배울 때 항상 '평제탑(平濟塔)'이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함락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 바람에 낙화암과 더불어 '멸망한 나라' 이미지를 굳히는 데 한몫했다. 백제 사람들에게는 분명 자랑스러운 하나의 자산이자 문화였을 텐데 후세 사람들이 오래도록 그렇게 불렀다는 것을 알면 서운해할 듯하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인식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하지만 입구에 들어선 순간 저 멀리 보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빈 절터를 압도하는 존재감이 있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위엄이 느껴졌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그저 소박한 줄로만 알았지만 어딘가 투박하면서도 묵직한 모양새에서 힘이 전해졌다. 한편 층층이 쌓인 옥개석의 네 귀퉁이는 살짝 들어올려져 있어서 이와는 대조적인 세심함마저 엿보였다. 목조탑을 석재로 표현한 불탑답게 서로 다른 크기의 나무 블록을 쌓아 조립한 듯한 모습이 독특했다. 단순하면서도 디테일한 매력에 빠져 한동안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서편건물지

정림사는 백제시대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점 외에 자세한 기록이나 유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석탑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에 새겨진 글로 고려 현종 때 이 절을 '정림사'라고 불렀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은 터만 남아 건물의 배치를 추측할 뿐이다. 석탑을 중심으로 뒤에는 본관에 해당하는 금당이 있었으며 양 옆에는 부속 건물이 위치했다. 이후에 들른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모형을 통해 옛 사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당이 있던 자리에 놓인 건물과 석조여래좌상

석탑 뒤에 건물 하나가 놓여있었고 단청과 돌계단이 비교적 깨끗해서 지어진 지 아주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라는 이름의 불상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모자처럼 보이는 보관은 제작 당시 아니라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세부적인 모습이 많이 사라져서 손 모양과 의복 등은 알기 어려웠지만 설명을 읽고 보니 어렴풋이 두 손을 모은 듯한 지권인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불상의 손동작은 모두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지권인은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쥐어 두 손을 하나로 연결한 모양이며 이치와 지혜, 부처와 중생, 그리고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라는 뜻이다. 건물 안에 있기는 했으나 불상 주변에 울타리가 없는 데다 사람도 적어서 손상될까봐 조금 불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고려시대의 불상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정림사지 박물관의 전시장

정림사지 내부에 박물관이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인 전시물 배치와 디지털 자료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공간에는 정림사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사진과 같이 늘어서 있었다. 벼루부터 기와 파편 등 다양했는데, 특히 곱슬머리의 서역인을 형상화한 조각을 통해 그 시대에도 해외 국가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신기했다. 작은 유물들이 제각기 자리를 빛내는 모습에 감탄하다가 벽에 있는 버튼을 눌렀더니 갑자기 양쪽의 전시장 문이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순간 어두운 공간에 혼자 남겨져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마치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한 장면 같아서 들떴다. 몇 분 동안 음악에 맞추어 불이 순차적으로 켜고 꺼지며 장관을 연출했다. 예상치 않아서 제대로 된 영상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 문자를 새긴 것으로 보이는 기와

'정림사'라는 이름을 알린 기와 조각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 기록을 찾아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사실을 추론해 나가는 과정이 어려우면서도 중요하다고 한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보여 재미있을 라 예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런 학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 앞에 나타난 이러한 유물은 참으로 보석 같은 존재다. 요즘은 전자문서 등 디지털 기록이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이들이 먼 훗날 아날로그에 못지않게 보관 및 열람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디스켓 저장장치, 버전만 달라져도 열기 힘든 문서들을 떠올리면 아날로그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궁금해하며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아 모을 후세 사람들에게 이 기와 조각처럼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전자 기록 방식이 우려스럽다고 하더라도 분명 디지털은 참 유용한 수단이다. 정림사지 박물관을 포함하여 유적지와 전시관을 방문하면 영상 효과 및 정보 등 여러 디지털 자료를 볼 수 있다. 작년에 문화재청에서는 2030년까지 문화재의 보존 및 관리, 활용에 디지털 방식을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와 방안을 발표했다. 답사객으로서 활용 부문이 가장 피부에 와닿는다. 다양한 전시 형태 덕분에 호기심이 커지고 직관적인 자료로 인해 더 집중하게 된다. 문화 수용자뿐만 아니라 사업의 기획자도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문화유산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흔적으로 머물기보다 현시대의 사람들이 즐기는 하나의 문화생활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더 많은 관심이 모일수록 보존 및 복원에 힘을 얻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발전하는 모습도 하나의 역사이자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정림사를 복원한 모형
"답사는 물론이고 관광에서 우리가 만나는 옛 유물은 100퍼센트가 건축이다. 건축 이외에 우리가 보고 즐기며 배우는 것은 박물관의 미술품뿐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 시대, 한 민족의 문화는 건축이라는 나무에 미술이라는 꽃으로 남게 된다. … 그러니까 답사란 결국 건축을 보면서 한 시대를 읽어내는 일이다.
-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p.366


터만 남은 유적지에서 옛 모습을 상상하기를 즐긴다.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이 그렇다고 해도 다수의 사람들, 특히 외국인이나 학생들에게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떤 실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에 마련된 모형이 반가웠다. 금당은 예상보다 높은 복층이었고 그 뒤에는 강당이 위치했으며 동편과 서편 건물에서 입구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모형 위로 펼쳐지는 백제 시절의 사계절 영상을 통해 이곳에 있었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국립부여박물관과 중복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에 망설이다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대해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방문했다. 석탑을 본 것으로도 흡족할 만하지만 박물관에 들를 것을 추천한다. 정림사에 얽힌 역사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알아가며 빈 터에서 생긴 공백을 메울 수 있다. 또한 가볍게 둘러보기에 알맞은 크기와 좋은 시설이 만족스러운 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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