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전시를 관람했다. 카텔란은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행위예술가이며 정치, 사회, 문화 등을 풍자하기로 유명하다.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실을 돌아보면서 작가가 던지는 냉소적인 '유머'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었다. 각각의 작품에서 연상되는 메시지가 비극적이기도 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기도 했다. 답을 말하기보다 생각을 유도하는 오디오 가이드 덕분에 나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었고, 그 내용을 여기에 적어보려고 한다. 크게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금 불편한 사진도 있을 듯하다.
<동준과 준호(Dongjun and Junho), 2023>
자칫하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다. 왼쪽은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오른쪽은 1층 로비에 있다. 만약 미리 알고 가지 않았더라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속으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관람객은 실제 사람인지, 작품인지 혼란스러워했다. 첫 작품부터 카텔란이 전하는 주제는 강력했다. '우리(We)'라는 전시의 제목처럼, 동준과 준호는 각각 혼자 있지만 엄연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노숙인'이거나 '그들'이 아니라 평범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본주의하에서 누구라도 의식주 중에 '주'가 사라질 수 있음에도 동준과 준호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닌지 묻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라(Il Bel Paese), 1994>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카펫이다. 이탈리아 지도와 함께 '아름다운 나라(Bel Paes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19세기 신학자가 나라의 자연경관을 소개하며 쓴 책의 제목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카펫 위에 올라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1994년 당시에는 수많은 관람객들로 인해 더럽혀졌다. 이를 통해 카텔란은 무분별한 관광산업을 비롯하여 표면적인 국가 이미지와 실체 간의 괴리를 나타냈다.
과잉 관광(Overtourism)은 오랫동안 이어진 문제다. 관광산업은 분명 경제활성화에 도움되지만 여행객의 지나친 방문으로 자연과 문화유산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주민의 생활에도 피해를 준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관광을 위하여 방문시간을 설정하거나 입장료를 높이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제한할 당시, 베네치아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60년 만에 운하가 맑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나라를 실제로 방문하여 경험하다 보면 미디어 및 소문으로 접하는 이미지와 다를 때가 있다. 물론 더 좋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한데,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 정부에서는 매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와 주로 어떤 관광을 했는지, 그리고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을 조사하여 발표하고 있다. 제3자의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관광 분야의 개선점을 찾는 데 참고할 만하다.
<노베첸토(Novecento), 1997>
홍수에서 구조되는 순간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말은 위로 끌어올려지는 힘과 중력 사이에서 목과 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으며, 작품이 제작된 1997년을 기준으로 20세기의 몰락과 미래의 경고를 나타낸다. 꽤 오래된 작품이지만 지금의 우리도 마주하는 현실이다. 편리하고자 만든 기술이 사람의 노동과 가치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점점 커지는 것이 한 예다. 인공지능으로 인하여 현재의 일자리는 줄어들겠지만 더 나은 직업이 생겨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적성과 성격이 있기 때문에 기계처럼 부품을 교체하듯이 단기간에 직무를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에게 있어서 '더 나은' 직업은 적성을 살리며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분야일 테지만 그와 관계없이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허리에 매인 끈이 올라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목에 가해지는 부담이 커지는 말의 모습이 우리와 닮았다.
<코미디언(Comedian), 2019>
이 바나나는 자그마치 1억 4천만 원에 달한다. 물론 전시장의 바나나 자체는 흔한 송이에서 하나를 떼다 붙여 놓은 것일 테지만 2019년 미국 마이애미에 전시되었을 당시 경매로 팔린 금액이 그렇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테이프로 고정된 바나나를 보기 위해 관람객이 몰려서 보안 요원을 배치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바나나가 팔리자 카텔란은 떼서 먹어버렸다. 그저 바나나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그 자체가 하나의 풍자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가격이 내려갈수록 수요가 증가하지만, 과시적으로 소비하는 사치품은 예외이며 이를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라고 한다. 가격이 비싸면 그만큼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소수의 특권처럼 여겨져서 구매하게 된다. 집에 있던 바나나와 다를 바 없지만 이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과 삼엄한 경비, 입에 오르내리는 뉴스와 소문, 너도 나도 경매 금액을 제시하는 경쟁적인 분위기 등이 모두 합쳐져서 1억 원 이상의 금액을 만들어냈다. 작품을 구매한 사람은 카텔란이 먹을 것까지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한번씩 회자될 때 '그거 산 사람 나야.'라고 한마디 할 수 있다는 데서 그만큼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프랭크와 제이미(Frank and Jamie), 2002>
<밤(Night), 2021>
두 작품은 공권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첫 번째 '프랭크와 제이미'는 9.11 테러 직후에 뉴욕의 한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이다. 경찰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쌍둥이 빌딩처럼 나란히 뒤집혀 있는 모습에서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가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밤'은 마치 별이 뜬 밤하늘 같지만 자세히 보면 검은색의 성조기에 총알 자국이 있다.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두 건이나 발생할 정도로 심각하다. 최근에는 3살 아이가 총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언니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특정 단체의 로비로 인해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고 있으며, 법안의 발의와 부결이 반복되는 동안 피해자는 늘어만 간다. 이러한 문제를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점이 카텔란답다.
<사랑이 두렵지 않다(Not Afraid of Love), 2000>
저는 인종이 아무 상관없는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세상, 인종적 위계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우리는 종종 꿈의 세상으로 상상하거나 묘사합니다. 그런 세상이 찾아올 가능성이 아주 적기 때문에 에덴과 같은 유토피아로 그리는 것입니다. - 토니 모리슨, 『보이지 않는 잉크』p.142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은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쉽게 꺼낼 수 없는 문제를 의미하는 영어 표현이다. 좁은 공간에 들어서며 흰 천을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은 코끼리를 보자마자 연상되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마도 일상에서 언급하기 어려운 이슈를 순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코끼리는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종 차별만큼 소모적이고 의미 없는 갈등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넓은 지구상에 모두 똑같은 인종과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건만 여기에 우열을 매기고 탄압과 범죄를 일으키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생김새와 출생 지역을 선택하지 않았고 각자의 문화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영토 분쟁이 한창이던 시절, 집단을 보호하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을 배척할 만한 명분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생겨난 것이 인종 차별이 아닐까 싶다. 이동과 소통이 자유로워진 환경에서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뿌리 깊게 자리잡은 사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He), 2001>
이 작품을 멀리 뒤에서 보았을 때는 한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앞모습을 보니 히틀러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단순한 기도 장면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표정이 묘해서 용서를 빌며 울먹이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뭔가 불만이 가득하지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우선 참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인 표정이 읽히는 이유는 히틀러가 과연 생존했더라면 반성을 했을지 하지 않았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라졌지만 학살과 혐오의 상징으로 남아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일 그가 생포되어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알게 모르게 나치를 추종하는 세력이나 특정 민족을 혐오하며 정당성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듯하다.
<모두(All), 2007>
서늘하면서도 익숙한 모습이다. 참사 현장을 전하는 뉴스에서, 학살 장면을 포착한 사진에서 접했다. 주름이 사실적으로 잡혀있지만 다행히 대리석으로 만든 모조품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면서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 뒤에는 카텔란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을 축소하여 제작한 작은 나무 박스가 있는데,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해 두어서 줄을 길게 서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 옆에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게 되었고 그것이 마치 사건 현장을 둘러싼 모습 같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충격적이면서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지만 전시장을 한참 돌다 보니 어느새 무던해진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무심하게 지나치는 수많은 뉴스들을 떠올렸다. 더이상 누구도 이러한 현장을 겪지 않도록, 만일 피할 수 없는 재해라면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가까이 혹은 멀리 일어나는 일들에 '모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무제(Untitled), 1999->
위트 있는 전시라고 하더니 너무 주제가 무거운 것이 아닌가 하던 중에 발견한 작품이다. 마치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돌처럼 보여서, 어떤 비극일까 하며 오디오 가이드를 듣다가 이것이야말로 블랙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BRAZIL v ENGLAND 2-0' 이런 식으로 글자가 줄지어 새겨져 있다. 1874년부터 잉글랜드가 패배한 축구 경기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써, 축구와 전쟁을 겹쳐 보이게 만든다. 스포츠 경기를 둘러싼 과열된 반응에 의문을 제시하고 집단에 의해 가려지는 개인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축구 경기에 관심이 크지는 않아도 월드컵만큼은 챙겨 보는 편이다. 한국 대표팀이 패배하면 물론 기분은 안 좋지만 선수와 감독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집과 경기장에서 관람하는 우리보다도 땀 흘리며 훈련하고 경기를 뛴 그들이 더 속상할 것 같아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일전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생각하면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에 허를 찔린 기분이다.
<숨(Breath), 2021>
평화로워 보이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배경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카텔란은 이탈리아의 한 성당에서 귀족 여성의 죽음을 기리는 조각을 보았는데, 누워있는 사람 옆에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듯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이와 더불어 어린 시절에 주무시는 부모님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던 자신의 습관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강아지가 고독사한 주인 옆에서 며칠 동안 굶으며 자리를 지킨 이야기, 갑자기 병원에 실려간 주인을 한참이나 집 앞에서 혼자 기다린 이야기 등을 들었다.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으로서 한참 동안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 잠든 강아지의 얼굴 근처에 가까이 누워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는 한다. 쌕쌕하는 따뜻한 날숨에 행복감을 느낄 때면 오랫동안 이대로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It), 2023>
고양이, 그중에서도 검은 고양이는 오랜 시간 외면 받아왔다. 그저 태어나 보니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일 뿐이건만 불길한 취급을 받은 것이 억울해서인지 새초롬하게 돌아앉아 있는 듯하다.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만난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면서 반가움과 애잔함이 동시에 올라온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살아내야 하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아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수명이 짧은 편이다. 다행히도 아기일 때 발견되어 입양 가거나 어느새 사료를 먹고 잘 자란 검은 고양이들이 있다. 잠시 그들을 불러서 이 고양이를 좀 달래주라고 하고 싶었다.
<무제(Untitled), 2007>
<무제(Untitled), 2007>
가끔 동물의 머리를 장식품으로 걸어놓은 모습을 보면 썩 달갑지가 않다. 첫 번째 작품은 그 벽면의 뒤편을 보는 듯하다. 나와 대상을 분리하면 상대가 느끼는 고통에 무뎌지고 죄책감과 멀어지게 되는데, 동물 학대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안락함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카텔란이 인조털로 제작한 줄 알았지만 박제된 동물들이었다. 예전에 여행하면서 호기심에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처음 박제 동물들을 접했고 마음이 좋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생과 사가 결정된다. 가축들은 식용을 위해 길러지고 애완동물들은 외모의 귀여움에 따라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렇게 살아온 동물들이 세상을 떠나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편히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박제 전시는 기피해 왔는데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렸다. 어떤 현실은 아무리 피해도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카텔란이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직접 경험한 셈이다.
<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Charlie Don't Surf), 1997>
휑한 벽면을 향해 혼자 등지고 앉아있는 아이가 가뜩이나 외로워 보이건만 가까이 다가가보니 손등에 연필마저 꽂혀있다. 어린 시절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카텔란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부하기 싫어도 어떻게든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요즘 학교의 범위를 벗어나 진로를 찾으려는 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한 해 초중고 자퇴생이 4만 명에 달한다. 시대는 변해가는 반면 교육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데다가 입시 위주의 환경으로 경쟁이 과열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듯하다.
조금 보수적일 수 있겠으나, 어른이 되어 바라본 입장으로서는 이왕이면 평범하게 교육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쉬운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의식은 바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사회에서는 졸업장을 원한다. 등하교를 반복하는 시스템이 답답하기는 해도 그걸 떨쳐내고 스스로 배움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고,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자신이 가진 독특한 이력이 양날의 검으로 다가올 수 있다. 물론 요즘에는 학업 외에도 다양한 길이 있으나 반드시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교육 이수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선택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어떤 일이 다가올지 예측하고 행동에 따른 결과와 상황에 책임을 다하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학생과 대화하려는 어른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림자(Shadow), 2023>
<어머니(Mother), 1999>
두 사진 모두 카텔란이 어머니를 기리는 뜻에서 만든 작품이다. 첫 번째는 냉장고 안에 밀랍으로 만든 어머니 모형이 있다. 조금 괴이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식사를 챙겨주던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날 평소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온 어머니가 그 안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듯도 하다. 두 번째는 고행 수도자가 기도하는 손만 드러낸 채 땅에 두 시간 동안 묻혀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며,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카텔란이 표현한 하나의 의식이라 여겨지고 있다. 어떤 의미이든지 간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전해져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Father), 2021>와 <무제(Untitled), 2008>
<무제(Untitled), 2008>
서로 다른 두 작품이지만 묘하게 어울려서 하나의 사진으로 담았다. 발은 종종 삶의 고난을 상징한다. 사진 속 발의 주인공은 카텔란 자신이지만, 아버지가 살아내야 했던 고된 생활이 느껴진다. 작품을 보며 다른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일을 하시는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왔고 그런 생활을 몇십 년이나 이어오셨다. 어릴 때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존경스럽다. 또한 그런 와중에도 한 번도 일하기 싫다 말하거나 힘든 내색을 비치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인다. 낡은 신발에서 크고 있는 식물이 아버지의 고달픈 나날 덕분에 자랄 수 있었던 나 자신을 보는 듯했다
<보이드(Void), 2019>
제목은 '빈 공간'이지만 상당히 복잡하다. 카텔란의 머리 주위로 그의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으나 나는 마치 명상의 시간 같았다. 머리를 비우려고 멍하니 있다 보면 오히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침범해서 각각 짧게 스쳐 지나가고는 한다. 템플스테이에서 체험한 명상 프로그램이 연상되었다. 가만히 앉아 촛불에만 집중하며 1부터 10까지 세다가 순간 다른 생각이 들면 다시 1부터 시작하는 거였는데, 예상보다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3 이상 넘어가는 참가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모두들 비슷한 모양이다.
<유령, 2021+ 발견된 작품(Ghosts, 2021+ found work), 2021>과 전시장 비둘기
9.11 테러 희생자를 기리고 구조대에게 감사를 전하는 메시지들이 뉴욕 공식 슬로건이 새겨진 캔버스 배경에 적혀있다. 카텔란은 이 캔버스를 뉴욕의 어느 한 시장에서 발견하여 전시하였는데, 이처럼 원래 있던 일상의 물품을 재해석하여 발표하는 것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한다. 이 작품 위를 비롯하여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는 비둘기들이 독특했고 마치 야외 전시를 둘러보는 기분이 들었다.
비둘기는 은근히 호불호가 강한 새다. 따라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카텔란의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비둘기와 비슷하다. 개인의 경험과 기억, 가치관에 따라 선호도가 극과 극으로 나뉠 것이다.
<무제(Untitled), 2001>
"나는 예술이 불편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보기 좋은 디자인 제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침묵해 온 이슈들을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한 용기는 누구나 인정할 만하다. 이 작품은 카텔란 모습을 한 인형이 미술관의 바닥에 뚫린 구멍을 통해 관람객을 훔쳐보는 듯하다. 그가 '절대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 당신이 본 것을 토대로 스스로 해석하라'고 한 만큼, 관람객이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것만 같다. 한눈에 알기에는 난해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흥미로웠고 기억에 남았다. 일상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문제나 인간의 본성 등을 창의적인 언어와 보편적인 예술로 풀어낸 작품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취향에 잘 맞았다. 전시물에서 상기된 사회, 문화, 동물 등 모두 한번쯤 블로그에서 다뤄보고 싶은 주제였다. 이번에는 간단히 언급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하나씩 조금 더 자세히 쓰고 싶다. 한 번의 관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이어나갈 동기를 얻었고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