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라잉로빈 May 22. 2023

[도서]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 마음속에 살던 작은 아이



생텍쥐페리의 대표적인 작품, 『어린 왕자』가 출간된 지 어느새 80년이 흘렀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어린 시절 학급문고에서 꺼내어 읽었을 때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고, 과연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을 만한 작품이었다. 말솜씨로 보아서는 전혀 아이 같지 않은 왕자가 등장하여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어는 순수했지만 세상을 모두 아는 듯했고 상징과 은유로 가득해서 자꾸만 곱씹게 만들었다.





 

나는 좀 똑똑해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항상 품고 다니던 내 그림 제1호를 꺼내 그를 시험해 보곤 했다. 그가 정말 이해력이 있는 사람인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늘 이런 대답이었다. "모자로구먼." 그러면 나는 보아뱀 이야기도 원시림 이야기도 별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트럼프 이야기, 골프 이야기, 정치 이야기, 넥타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그 어른은 그만큼 분별 있는 사람을 하나 알게 되었다고 아주 흐뭇해하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상대방에게 맞춰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공통적인 주제로 시작하여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든다. 무슨 상황에서 어떻게 만난 대상인가, 얼마나 정서적으로 가까운가에 따라 다르게 대하게 된다.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면 편하게 슬쩍 말을 건넨 뒤 반응을 보고 적정한 선을 가늠하기도 한다. 지난날, 분위기에 휩쓸려 신나게 이야기했으나 반응이 예상과 달라서 당황했던 경험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슬며시 드는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쌓이며 만들어진 나름의 방법이다. 또한 시간이 흐르며 마주치는 사람들의 연령대와 배경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더 조심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관심사나 생각, 표현 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으면 편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과 다른 면에 우호적이었다. 어린 왕자에 대입해 보면, "이건 사실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이다."라고 했을 때 '대체 무슨 소리지'라며 시큰둥한 사람과는 골프와 정치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고 '그러고 보니 그렇네'라며 흥미를 보이는 사람과는 원시림과 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대화를 할 때 선입견과 편견으로 미리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편이다. 나와 다른 면을 '이상하다'기 보다 '독특하다'라고 여기는 순간 거부감에 앞서 호기심이 생긴다. 그러면 생각이 열리고 더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당신이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말하면 어른들은 절대로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무슨 놀이를 좋아해?" "나비를 수집하니?"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법이 없다. 그들은 "그 애 나이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야? 몸무게는? 아버지는 벌이가 괜찮으시니?" 같은 것을 묻는다.
만약 어른들에게 "붉은 벽돌로 된 아름다운 집을 봤어요. 창가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놀고 있는…"이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멋진 집이구나!"라고 감탄한다.


박물관 해설사로 일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이 유물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가요?"라고 한다. 그러한 관람객에게는 이 유물이 어느 시대에서 왔고 어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워낙 그런 질문이 흔한 탓인지 해설을 듣다 보면 "이건 대략 얼마의 가치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경우가 간간이 있다. 분명 정확한 수치가 아님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하는 관람객이 의외로 많다.

누군가 나에게 취미를 물어보면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답을 하고는 한다. 그러자 한번은 "그런 거 말고 땅을 보러 다녀요. 그게 더 도움 되니까."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건 취미가 아니라 생계가 아닌가 싶기도 했고 유적지와 부동산 간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 어떠한 '장소'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땅값'과 연결이 된 듯하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그 장소에 매겨진 가격이 아니라 담겨진 시간이기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잘 있어." 그는 꽃에게 말했다.
그러나 꽃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바보였어." 이윽고 꽃이 말했다. "그래, 난 너를 사랑해. 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어, 내 잘못이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도 나만큼 바보였어. 부디 행복하게 지내… 그 유리 덮개는 조용히 치워 두고. 이젠 필요 없어."
"하지만 짐승들이…"
"커다란 짐승들이 온대도 난 겁날 게 없어. 나한텐 발톱이 있으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순진하게 가시 네 개를 내보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게 꾸물거리지 마. 자꾸 마음이 쓰여. 벌써 떠나기로 결심했잖아. 어서 가."
꽃은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도 오만한 꽃이었다…


어린 왕자가 스스로 별을 떠나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장미와의 갈등이었다. 왕자의 말에 따르면 장미는 아름답고 향기로웠지만 심술과 허영심으로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이 장미는 생텍쥐페리가 그의 아내, 콘수엘로를 모델로 했다는 해석이 많다. 실제로 그는 결혼 생활을 하며 자주 부딪쳤을 뿐만 아니라 아내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망명한 기간이 있었으며 기침하는 장미와 천식이 있던 콘수엘로를 겹쳐 보이게 만든 점 등을 감안하면 맞는 듯하다.

장미는 어린 왕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설픈 거짓말을 하고 까다롭게 굴었다. 하지만 기껏 무기로 내밀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 왕자의 다섯 손가락보다 가늘고 적은 '가시 네 개'에 불과한, 어딘가 지켜주고 싶은 존재였다. 결국 어린 왕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꽃을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 꽃은 나를 향기롭게 해주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었어."라며 장미를 두고 온 걸 후회한다. 그건 사실 장미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왕자가 들어주는 까다로운 요구의 크기와 빈도로 사랑을 확인하기보다, 아침마다 물을 주고 둘이 함께 사는 별이 망가지지 않도록 꾸준히 청소하는 그의 모습에서 마음을 읽었다면 부담을 지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단한 표현이나 노력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다정한 말 한마디와 따뜻한 눈빛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장미'의 주인공, 콘수엘로는 남편이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는 걸 알고 어땠을까. 아마도 달콤씁쓸했을 것 같다. 기껏 작품에 등장해서는 오만한 말을 늘어놓으며 심술부리는 장미라니. 억울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왕자가 끝까지 마음에 품은 존재라는 데서 많은 생각이 들었을 듯하다. 전쟁에 참여한 생텍쥐페리는 비행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는데, 당시 차고 있던 팔찌 안쪽에 '콘수엘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마치 어린 왕자처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아내를 그리워했다.





 

"길들인다는 건 뭐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너무 잊힌 말이긴 한데,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너는 아직 내게 수많은 다른 남자아이 중에 한 명일 뿐이야.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지. 너 역시 내가 필요하지 않아. 그런데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게 돼. 너는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나는 모든 발걸음들과 구별되는 단 하나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차리게 될 거야. 다른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 얼른 땅속으로 들어가겠지. 너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 음악을 들은 것처럼 땅굴에서 튀어나올 거야.
그리고 봐봐! 저기 말이야! 밀밭이 보이니?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나한테 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 밀밭을 봐도 아무 생각이 없어. 그렇지만 네가 금발머리잖아.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이면 환상적일 거야! 황금빛으로 물든 밀을 보면 네가 떠오를 테니까."


'길들이다'는 어쩌면 상대방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다, 혹은 통제한다는 의미 같아서 그보다는 '스며들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수많은 이들 속에서 한 사람만이 특별해지기까지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고, 이는 의지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다. 따라서 관계를 형성할 때 소위 '밀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붙잡아 두거나 마음을 얻기 위해 일부러 애를 태우는 전략을 세우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아서다. 사람의 마음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을뿐더러 장기적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마음속 빈 공간에 누군가 서서히 흘러들어 채워지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기 어렵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취향과 특징을 기억하게 되고 일상 속에서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떠오르고는 한다. 그래서 이별이 힘든 것이다. 채워진 만큼 비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우는 자신에게 스며든 어린 왕자와 헤어지며 괴로워하지만 밀밭의 색깔, 즉 추억을 얻은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정말 간단해.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모래밭이 왜 그처럼 신비롭게 빛나는지 문득 깨달았다. 어렸을 때 나는 고가(古家)에서 살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그 집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했다. 물론 아무도 그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고, 어쩌면 찾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물이 우리 집 구석구석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래."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집이나 별이나 사막이나 그걸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야!"
"아저씨가 내 여우하고 같은 생각이어서 기뻐." 그가 말했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 '여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 마음에 품은 소중한 존재다. 한국 전쟁 중 남한 병사가 포로로 붙잡은 북한 병사를 선박으로 이송하다가 다 같이 무인도에 표류한 후 이들은 '여신'의 존재로 하나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미처 고백하지 못한 첫사랑 상대다. 섬에 실제로 여신이 있는지, 당장에 만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자체만으로 병사들은 희망을 품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대에 왜 사람들은 더 힘들어하는가'가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 요즘 사람들이 나약해서, 어려움을 겪지 못해서라고 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희망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비하면 가시적인 물질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는 내다보기 힘들다.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겠지, 꾸준히 월급을 저축하면 내 집을 마련하겠지, 아이가 앞으로 더 나은 세상에서 자라겠지 하는 희망이 점점 흐릿해진다.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현대인들의 고민을 파악할 수 없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기 어렵다. 따라서 상황을 보다 근본적으로 파고드는 통찰력과 사람의 동기 및 감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저씨는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될 거야.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그 별들 중 하나에서 내가 웃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이 웃고 있는 것 같을 거야.
그리고 슬픔이 지나고 나면(슬픔은 늘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아저씨는 나를 알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아저씨는 언제나 나의 친구일 거고. 그래서 나와 함께 웃고 싶을 거야."


어린 왕자는 지구에 머문 지 일 년이 되어 자신의 별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사막에 불시착하여 우연히 어린 왕자를 마주친 주인공은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서 그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믿음과 그리움을 품은 채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특히 사막 위를 비행하거나 길가에 핀 장미를 볼 때면 어린 왕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릴 테고, 여우가 그랬듯이 주인공 또한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지구로 오기 전, 어린 왕자는 여러 별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허공에 의미 없는 명령을 하는 왕과 별을 소유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업가, 그저 명령에 따라 1분 1초도 쉬지 않고 가로등 불을 켜고 끄는 사람 등이었다. 과장되기는 했지만 현실과 맞닿아 있는 어른들의 모습이어서 흥미로웠다.







"별거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생텍쥐페리가 식당 냅킨에 장난 삼아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묻는 출판업자에게 한 말이다. 출판업자는 그림 속의 소년을 소재로 어린이용 책을 써줄 것을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어린 왕자』가 탄생했다. 가끔 어느 순간에, 과거의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나 경험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텍쥐페리는 그 사실을 작품으로 오롯이 전달한 작가였다.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그는 미술학교 건축학과에서 공부했다. 어린 시절부터 낙서처럼 그림 그리기를 즐기면서도 스스로 그다지 자랑할 만한 특기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공군으로 군복무를 하며 비행기 조종법을 배웠으나, 당시 조종사는 급여가 많지 않았던 탓에 사무원과 외판원으로 일을 했고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항공사에 입사하여 비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내놓았으며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한 경험으로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 풍경을 그려낼 수 있었다.

『어린 왕자』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라는 점이 의외다.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오래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작가를 꿈꾸는 초등학생 조카에게 어린 왕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읽은 것과 똑같은 책을 선물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초등학생이 읽기 알맞게 나온 도서를 주었다. 조금 더 자라면 아마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을 때 그의 말이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 인용 도서

『어린 왕자』- 황현산 번역, 열린책들

『생텍쥐페리의 문장들』- 신유진 번역, 마음산책


매거진의 이전글 [전시] 마우리치오 카텔란 <W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