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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Oct 25. 2023

[도서]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

영화, 그 사랑의 추억




마음산책에서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내준 책이다. 미처 나온지 몰랐거나 선택지에 없던 도서가 오면 마치 선물 받는 기분이 드는데, 이번에 나온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도 그랬다. 서이제 작가와 이지수 번역가가 영화에 대한 하나의 주제를 놓고 각자 쓴 글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나도 마음 한편에 묻혀 있던 추억이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새로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도 추가했다. 같은 영화에 제각기 얽힌 기억이 흥미로웠고, 다른 영화 비슷한 관점을 말하는 데서 공감하기도 했다.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어릴 때 부모님과 극장에 갔는데 그때 경험이 좋았다. 둘째,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집에 주로 혼자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다. p.59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인생 영화 세 편이 생각났다. 첫 번째는 아마도 일생 중 가장 자주 돌려본 영화가 아닐까 싶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글의 후자에 속하는, 집에서 혼자 영화를 많이 보던 아이가 나였다. 누가 녹화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말의 명화로 방송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테이프가 있었다. 집에 유일하게 있는 영화여서 빌려 온 비디오가 딱히 없으면 심심할 때마다 반복해서 봤다. 러닝타임이 긴 덕분에 시간이 잘 흘러갔는데, 문제는 어린 나이라 이해를 못 해서 그런지 정확히 기억나는 장면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 남은 건 스칼렛이 낑낑거리며 코르셋 안에 몸을 욱여넣고 파티에 나가 인기를 한껏 즐기다가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던 애슐리에게만은 한없이 약해지던 모습이었다. 레트와 투닥거리며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지만 결국 어려워질 때면 다시 그를 찾았는데, 그런 와중에도 계속 애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린 나로서는 알기 어려웠다. 스칼렛이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마땅히 걸칠 만한 것이 없어 커튼까지 떼어 드레스를 맞춰 입고 레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 뜬금없이 우리집 커튼으로 옷을 만들면 어떨까 상상하는 나이였을 뿐이다.

몇 달 전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것은 아니지만, 어른이 된 나에게 인상 깊게 남은 건 스칼렛의 연애사가 아니라 의존적이던 한 여인이 고난을 겪으며 독립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었다. 유명한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를 말하는 스칼렛의 표정이 마치 이제야 진정한 자신을 찾은 것처럼 보여서 영화는 끝났어도 그 너머의 삶이 기대되었다. 이 영화의 결말이 지금까지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야반가성>은 지금의 나로서는 명작이라고 말하기 힘든 영화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별로네'라는 말로 간단히 감상을 정리할 수 없는 마음도 분명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날의 숨 가빴던 하굣길, 상영관 뒷문에 걸린 벨벳 커튼의 감촉, 세피아 톤 스크린을 마주했을 때의 설렘, 직원 몰래 영화를 한 번 더 봤을 때의 떨림과 하나가 되어 내 마음속 '특별한 영화' 폴더에 이미 저장 완료 되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웃으라고 하면 웃고 울라고 하면 우는 게 가능한 나이에 봤던 것도 그 특별함에 무게를 더하는 데 한몫했다. p.37


인생 영화 두 번째는 장국영 주연의 '야반가성'이다. 어릴 적 언니는 마치 개화기에 신문물을 소개하는 상인처럼 유명한 영화나 노래를 알려주었고, 예나 지금이나 유행에 둔감한 나는 마냥 신기해했다. 특히 방학이 되면 점심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언니가 추천한 영화를 같이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중에는 영화 '야반가성'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오페라의 유령' 동양 버전이 아닐까 싶은 내용이지만 홍콩 영화와 장국영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꽤 감명 깊게 보아서 아직도 기억날 정도로 영화 주제곡을 듣고 또 들었다.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세계다크투어'라는 프로그램에서 장국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새삼 언니와 '야반가성'을 보며 그의 연기와 노래에 감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번에 방송을 보고 나서야 청년 같던 장국영이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것과, 쏟아지는 관심과 루머에 힘들어하며 은퇴했었다는 것, 그러다 돌아와 찍은 첫 작품이 '패왕별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왕별희'는 재작년 즈음에 다시 보았는데, 똑같지는 않더라도 우여곡절 많은 전개와 비극적인 결말이 장국영의 삶을 연상시켰다. 영화 속 데이는 어린 나이에 엄마로부터 극단에 버려져 여성 역할을 부여받아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했다. 인기는 얻었지만 세상이 기대하는 그의 모습은 캐릭터 안에 갇혀있었고 결국 데이는 극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시대는 지나 데이의 캐릭터도, 그 자체도 더이상 사람들의 환호를 받지 못했고 결국 데이는 분장을 한 채 극중 인물이 그러했듯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장국영을 두고 오가는 여러 말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인상은 한번 형성되면 어떠한 행동을 해도 바꾸기 어려운 데다가 루머를 증명하듯 공개되는 편집된 영상과 사진이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거품처럼 떠도는 이야기 안에 있는 장국영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기억 속 장국영은 청춘으로 남아있고 영화에서도 그렇다. 그의 시간은 멈췄지만 나의 시간은  래전 본 영화가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로즈가 잭을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 허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만약 실제 이야기였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잭을 어떻게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 그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 잊히지 않아. 나였다면 그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거야. 같이 죽었을 거야." 언젠가 내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자, 친구는 내게 답했다. "그러니까 로즈에게는 더 잘 살아야 하는 몫이 있는 거야. 잭이 선물해 주고 간 삶이니까."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문득, 어쩌면 함께 죽는 것이 더 비현실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45


세 번째는 단연코 '타이타닉'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의도치 않게 여러 번 돌려 본 영화라면, '타이타닉'은 감동을 되새기기 위해 가장 많이 본 영화다. 학교에서 단체로 극장에 가서 처음 관람했던 날 밤, 자꾸만 생각나 잠을 자기 어려웠다. 우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고였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고, 배가 가라앉는 와중에도 예의를 지키던 승객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연주하던 악단, 그와 반대로 어두운 본성이 드러나던 사람들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게다실제 증언을 토대로 만든 인물들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물론 영화의 큰 줄기인 잭과 로즈의 이야기도 사춘기였던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함을 느끼던 로즈가 극적인 순간에 잭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노인이 되어 마음속에 간직했던 추억을 꺼낸다는 내용은 지금 보아도 참 설레면서 아련하다.

만일 배가 침몰한 뒤 잭도 생존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로즈는 정략결혼과 다름없는 약혼자를 벗어나 잭과 지지고 볶으며 현실을 살아냈을 테고, 배에서의 낭만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비록 사랑의 형태는 금 달라졌더라도 그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여 먼 훗날 함께 타이타닉의 잔해를 보며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는 러한 결말이 더 좋지만, 영화가 그랬다면 관객 입장에서 그토록 사무치게 '타이타닉'을 보고 또 볼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배와 함께 가라앉아 버린 연인을 가슴에 묻고 그가 선물해 준 삶을 살아가는 로즈의 이야기가 영화로서는 더 낫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로즈가 잭과 3등실에서 '진짜' 파티를 즐기며 짓는 환한 표정이다. 크고 작은 경험이나 인연이 어떻게 남더라도, 돌이켜 보면 당시에 내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음을 깨닫고는 한다. 자유를 꿈꾸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괴로워하던 로즈에게 잭과의 만남은 하나의 터닝포인트였다. 로즈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자유로운 영혼을 잭이 끄집어냈고, 그 계기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다시 솔직하게 돌아보며 과감하게 행동해 나갔다. 그 출발점이 바로 3등실 파티 장면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원본과 복제본의 가치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대량으로 복제되어 어디로든 유통될 수 있었다. 소수의 특정 계층이 오라나 작품의 가치를 독점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전의 모든 예술이 상층에서 하층으로 이동했다면, 영화는 그 움직임을 달리한다는 점. p.228


어린 시절에는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거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는 영화가 전부였다. 적은 용돈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데다가, 두세 시간 푹 빠져있다 보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멀티플렉스가 주변에 들어서며 극장에 가는 빈도도 늘어났고, 통신사 카드로 할인을 받거나 아침 일찍 조조 영화로 관람하면 저렴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비교적 접근성이 높은 예술이다.

요즘에는 무료 전시도 많아졌지만 진품은 하나여서 거리에 제한이 있고, 공연은 위치뿐만 아니라 입장료도 고려 대상이 된다. 시간 및 공간 제약이 있는 예술 특성상 희소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절, 공연 실황을 녹화하거나 실시간으로 송출하는 예가 늘어나며 물리적인 장벽도 많이 낮아졌다. 그러나 공연은 처음부터 상영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장감이 더해지지 않으면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최근에는 영화도 NFT기술을 적용하여 마치 미술품처럼 영상을 소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희소성을 높이는 사례가 있다. 다만 영화는 아직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서 이미 공유된 영상을 특정인의 소장품이라 인식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 반대로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영상은, 흥행 성적에 따라 가치가 올라가는 영화의 특성으로 인하여 소유 원하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따라서 많은 작품에 걸쳐 활용되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미 오래전 명작으로 남은 영화의 리마스터링이나 팬층이 확고한 감독의 새 작품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듯하다.






"남들은 좋다는데 나만 별로고, 남들은 별로라고 하는데 나만 좋은 어떤 지점에서 취향이 나타날 것 같아요." p.204


어쩔 때 보면 나는 은근히 보편적이지 않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는 거의 인기가 없는 반면에 별 관심 없는 작품은 당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영화도 그런 편이다. 마블 시리즈 중에서는 오래전 제일 처음 나온 '스파이더맨' 한 편을 본 것이 전부고, 판타지 영화도 크게 좋아하지 않아서 '트와일라잇'이나 '반지의 제왕'은 한두 편 보고 접었다. 언니 부부는 새로운 마블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챙겨보는 편인데, 한번은 형부가 나에게 거기에 나온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눈을 끔벅이며 열심히 듣고 있던 중에 언니가 지나가며 말했다. "얘는 그런 거 안 좋아해."

그러면 나는 어떤 영화에 끌리는지 생각해 보았다. 어딘가 분명 존재하지만 드러내기 어려웠던 현실이나 사람의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영화를 보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구나 싶어서 감탄하고는 한다. 화려한 배경보다 사람에 초점을 둔 영화를 선호하지만, 한편으로는 보고 들을 거리가 풍부한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기도 한다. 전자는 집에서 밤에 불 끄고 배우의 표정과 대사, 행동에 집중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면 충분하지만, 후자는 거대한 화면과 풍부한 음향을 즐기기 위해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편이다. 취향은 제각기이므로 독립영화관을 주로 찾는 사람, 굳이 영화를 보면서까지 심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금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 좀비나 귀신이 나오는 영화에 흥미있는 사람 등 다양하다. 또한, 취향은 변하기도 해서 공포영화를 즐기던 내가 이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영화를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시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타인이 보는 세상을 나도 보고 싶었다. 카메라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p.249


학창 시절 나를 스쳐간 많은 장래희망 중에 그나마 한동안 붙잡고 있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 장면으로 나의 시선과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설레고 멋있는 일이었다. 결국 고등학교 때 나처럼 영화감독을 꿈꾸던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짧은 영화를 만든 후 청소년 영화제에 제출했고, 지금 떠올리면 스스로 대견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민망한 추억이 되었다.

거의 학예회 수준이라 물론 당선되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나름 열정으로 가득찼다. 선생님 몰래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내 영화를 어떻게 만들지 의논했고, 간혹 뜻이 맞지 않기도 했지만 곧 타협점을 찾았다. 영화를 볼 때는 쉬웠는데 막상 처음부터 만들자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내용 구상만 해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대사 쓰고 동선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동그란 얼굴에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가 달린 인물들을 네모칸에 그리며 어떻게 찍을지 부단히도 고민했다. 때마침 시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기자단 프로그램이 있어서 기기를 대여하고 촬영과 편집 방법배웠다. 출연자라고 해봐야, 당시 내가 속한 교지편집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너무나 고맙게도 잘 따라와 주었다. 나의 무엇을 믿고 다들 그 더운 여름방학 동안 카메라 앞에 서서 생애 처음 연기를 해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영화 자체는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나조차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결과물일지라도 만드는 과정 자체가 고등학교 시절 가장 행복했던 추억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어른이 된 지금, 영화감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지만 꿈을 위해 열중하던 나 자신이 좋았고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이 소중하게 남아있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센티해지기 위해, 센티해지지 않기 위해, 울기 위해, 웃기 위해, 멀미가 날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사슬을 두 시간가량이라도 끊어놓기 위해, 이 지겹고 답답한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p.157


언젠가부터 영화를 예전만큼 자주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워낙 짧고 다채로운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유튜브를 클릭하는 때가 영화 한 편을 진득하게 관람하는 시간보다 더 많아졌다. 최근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세 시간 동안 '오펜하이머'를 관람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상영관에 불이 켜진 순간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이제 조금 더 자주 영화를 봐야겠다 싶던 찰나에 읽은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는 꼭 맞는 책이었다. 덕분에 얼마간 잊혔던 추억이 되살아났고 스스로 영화를 참 좋아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때에 따라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르지만 대부분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기 위해서다. 난 후에도, 카메라 너머의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장면 연출에 어떤 의미가 있나, 극중 인물의 감정은 어땠고 배우는 무슨 심정으로 연기를 했나 등을 생각하는 시간 또한 거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한 번 보고 잊히는 것이 아니 계속 곱씹을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많이 떠오를수록 영화를 즐기는 시간 또한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생활이 더 풍요로워진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영화로 추억을 공유한다. 얼마 전 북스테이에 갔다가 내가 묵은 방 옷장에 비디오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마음으로 하나씩 살피다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구름 속의 산책'이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정작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가롭던 방학 어느 날 언니와 함께 재미있다며 여러 번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비디오 사진을 찍어두었다가 언니에게 보여줬고, 역시나 바로 알아보고는 반가워했다. 우리는 영화로 같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어릴 적,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었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다. 감상자로서 즐기는 편이 내게는 더 잘 맞고, 더 길게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이 책으로 호기심이 생긴 작품들을 적어두었다. 이제 하나씩 궁금증을 풀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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