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40분 경.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내가 내리기 바로 전 정류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린다. 창가에 앉아서 멍하니 방금까지 같이 버스에 올라있던 사람들이 제 집 방향을 찾아 멀어지는 걸 보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외출복이라기에는 다소 난해한 차림새를 한 중년의 여성분이 서서 하나 둘 내리는 사람들을 보다 어린 여자 학생 하나를 반갑게 맞이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에 말이다. 학생이 추리닝을 입은 걸 보니 아마 집에 들러 저녁 먹고 학원에 다녀온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 오래 전 중학교 때, 학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났다.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 살던 때였다. 종합학원 아니면 단과 과외가 전부이던 시절에 중학교에 들어가서 한 학기를 다닌 후로 종합학원에 보내졌다. 한 학년에 해봐야 두 반, 그것도 수업 진도와 수준 때문에 나눈 것이라 반 하나에 인원은 5명 정도가 전부였다. 학원 원장님 아들이 나와 동갑이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아들 특목고 진학을 위해 원장님이 직접 별도로 밤에 시간을 잡아 영어 심화 강의를 하셨다. 애 혼자만 시키자니 마음처럼 수업도 안 따라주고 동기부여될 게 없다는 판단으로 나까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었다.
문제는 학원 운영이 모두 끝난 후에 하는 수업이었던 터라, 가능한 시간이 밤 11시 30분부터 새벽 1시까지였다. 학원 건물은 살던 아파트 바로 옆 블록에 있어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는데 수업이 있는 밤이면 매일 아빠가 학원 건물 앞으로 데리러 나오셨다. 그때는 마냥 피곤하고 지치고, 아무리 호의라지만 그걸 선뜻 받아서 보낸 우리 부모님이 밉고 학원 원장 선생님에게도 고마운 마음보단 야속한 마음이 더 많이 들었다. 아빠도 아침 일찍 출근하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데리러 오시고, 집에 가면 엄마가 "배고프진 않아? 계란찜 해줄까?" 하며 반겨주셨는데 세상 다 밉다는 불퉁한 얼굴로 데리러 오지 말라는 소리나 빽빽 해댔었다. 더 어릴 때 동네에서 혼자 걷다 나쁜 사람을 마주친 경험이 몇 번 있는데도 그랬다. 내가 싫다고, 됐다고 해도 아빠는 매번 그렇게 데리러 나오셨다. 아빠가 모임에서 술을 드시고 일찍 잠드신 날에는 엄마가 대신 나오셨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오늘 본 모녀의 다정한 찰나를 보니 나 그때 진짜 못 됐었네-싶은 생각이 들어 입 안이 씁쓸했다. 집에 들어오니 며칠 지내다 낮에 돌아가신 엄마가 해두신 반찬이 냉장고에 그득하게 차 있는 게 보였다. 아침에도 봤는데 엄마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