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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26. 2019

큰이모

엄마는 육남매 중 둘째다. 위로 언니 하나가 있는데 형제들 중 가장 엄마와 가까운 게 그 언니, 내겐 '큰이모'인 분이다. 큰이모는 어린 시절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유일하게 대학에 가지 못 하고 바로 전화국 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시골 국민학교 교사인 외할아버지, 밭농사를 짓고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태던 외할머니와 함께 큰이모는 집안을 먹여 살리는 가족이 되었다. 조용하고 인내심 강하고 묵묵히 희생을 감수하던 큰이모와 달리 둘째인 우리 엄마는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고 외할머니는 따로 모아둔 돈으로 엄마, 그 아래 동생들까지 어떻게든 대학 졸업까지 시키셨다. 외할머니는 고된 밭일에 오랜 시간 아팠던 다리가 어느 이른 새벽 찾아온 뇌졸증으로 인해 마비가 된 후에도 병상에 누워 돌아가시기 전까지 큰이모에게 미안해하셨다.
큰이모는 전화국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한 후에도 구조조정과 희망퇴직의 바람을 맞을 때까지 계속 일했다. 그 사이 우리 엄마는 중학교 선생님이 되고, 외삼촌은 내로라하는 그룹의 중공업 회사에 취직하고, 셋째 이모는 한 고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가고, 넷째 이모는 대학생이 되었고, 막내 이모는 우리 아빠가 일하던 고등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현직 교육공무원 아니면 퇴직한 교육공무원, 그도 아니면 곧 교육공무원이 될 사람이 태반인 외가에 막내 이모 출생 후 십수년만에 내가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나이 어린 학생 이모들에게도 나는 신기하고 예쁜 존재였다. 그러다가 내가 기저귀를 더럽히거나 집을 엉망진창으로 해집고 있으면 차로 한 시간 거리로 출퇴근하는 우리 엄마 아빠 대신, 밭이나 시장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못한 외할머니 대신, 나를 봐주기로 하고 게이트볼 치러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신 친할머니 대신- 그 모두를 대신하여 나를 챙기고 보듬던 것은 모두 큰이모였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추억 삼는 것도 큰이모고, 어설픈 사춘기를 가장 걱정해준 것도 큰이모고, 드디어 제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게 된 다 큰 조카에게 쥐꼬리만한 연금에서라도 꼭 떼어다 "커피 한 잔 사먹어" 하는 명목으로 적지 않은 용돈을 주시는 것도 큰이모고, 내가 하는 이야기라면 누구보다도 귀 기울이고 함께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것도 큰이모다. 엄마는 항상 내게 얘기한다. "너는 엄마 아빠한테는 안 그래도, 정말 나중에 큰이모한텐 진짜 잘해야돼"라고.
환갑이 넘은 큰이모에게는 아이가 없다. 그래서 더욱 나를 어여삐여기고 생각할 여력이 있으실 거다. 그럼에도 똑같은 상황에서 그러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큰이모의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놀랍고 무척 감사하다. 오늘도 큰이모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간 나에게 준 것, 앞으로 줄 것들 모두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거나 갚아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고, 그런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고,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고 모두 잊으라고. 마음이 찡하다. 그런 큰이모를 옆에서 복잡해보이는 얼굴로 그저 지켜보는 엄마까지 같이 보고 있자면.
고등학생이었던 막내 이모도 이제 40대 중반이라고 한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외할버지는 암 수술만 세 번을 받으셨다. 나의 소중한 가족. 고마운 사람들. 오늘따라 외가 식구들이 참 보고 싶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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