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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한림 May 09. 2020

#1. 남면 경신리 김남연 씨의 1주기

남연씨, 봄과 여름 사이에서 쑥이 한창 자라는 내음이 납니다. 


글을 쓰는 오늘은 2020년 5월 9일 입니다. 당신 없는 세상을 살아간 지 벌써 일년이 되가네요. 저는 그동안 어떻게 바쁘게 살긴 한 것 같은데 잘 살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 따라 밥은 꼬박꼬박 잘 먹고 건강하게 지냅니다. 요즘 현순 씨는 삼남매가 어버이날로 김치 냉장고를 사주어서 신나게 김치를 담그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는 쑥떡도 진하게 만들어 다른 가족들과 노나 먹었습니다. 어제 있었던 추도식에는 당신의 손녀가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다들 놀라 무슨 일로 설거지를 다 하냐고 하니 “남연 씨를 위해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난 일 년은 저한테는 조금 빨리 흐른 것 같은데 남연 씨의 시간도 순탄히 흘렀을까요. 작년 5월에 꿈에 한 번 찾아오시고는 그 뒤로는 통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에서 멈춘 2019년 5월 9일, 그 이후의 시간들은 제게 당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함께한 24년동안 당신에 대해 나쁜 기억 하나가 없을까요? 좋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 몇 번 주어지지 않는 기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일찍이 태어나고 당신이 장수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제가 증손으로 함께 한 시간은 저에게는 감사히 맞물린 시간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복됨이 우리를 서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믿어도 될려나요. 


작년에 쓴 편지에도 적었는데 남연씨 배웅길에 저 멀리서 찾아온 노인이 계셨습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한국전쟁 중 군인이던 자신을 숨겨줘서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동네의 교회 목사 부부가 지방 선교를 떠날 때면 목사의 자녀들을 밥을 맥여 학교를 보내줬다면서요. 내년이면 백수(白壽)를 바라보던 노인의 가는 길에 어떻게 3백명씩이나 모여서 그리 좋은 얘기를 해주었는지. 남연씨는 무슨 마음에 그리 착했던 것이었나요.  


이전에는 죽음에 대해서 그저 앞으로 보지 못하겠다는 슬픔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달리 남연 씨와의 이별은 많은 잔상을 남깁니다. 제가 사랑했다고 말했던 날, 제 머리 속에는 하루 종일 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이라는 시였던 것 같은데, 시 전반에 ‘지금 말해야 한다. 지금이다.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내용으로 문단이 빼곡한 주문 같은 시였습니다. 그 시가 아니었다면 제가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가 차마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런 용기 이상으로 저는 제 하루를 온통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 뒤돌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인지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시간 앞에 무력하지만 능동적으로 살고자 합니다. 

시쳇말로 ‘욜로’라는 말이 세간에 유행입니다.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인데, 보통 인생 어찌 될지 모르니 아낌 없이 돈을 쓰라고 독려하는 말 입니다. 하지만 전 돈이 없으니 시간과 마음이라도 아낌 없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5월 9일은 제가 진정한 욜로로 태어난 날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사랑에는 결말이란 게 없다고 합니다. 그저 결말을 원해서 스스로 매듭을 짓더라도 매듭은 매듭일 뿐, 매듭 다음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고 합니다. 가끔은 먼 훗날에 저만 그 기억의 매듭들을 이어갈 것이 두렵습니다. 푸른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저랑 엄마와 삼촌, 그리고 할머니랑 다 같이 당신 집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수박을 까먹은 어느 여름 낮. 엄마 무릎을 베고 지나가는 땅개미를 보며 여름 바람 아래서 솔솔 자던 낮잠. 이 기억들은 언젠가는 오롯이 제것으로만 남겠죠. 할머니와 엄마가 다 떠나간 뒤에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처연히 저밖에 없을 것 같아서 외롭습니다. 


남연 씨, 일년의 글은 여기서 마칩니다. 나중에 차곡차곡 모아둔 제 편지들과 성경을 번갈아 가면서 읽어드릴게요. 


항상 사랑하고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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