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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한림 May 22. 2020

#2. 화장실

어디선가 나의 화장실을 지켜주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최근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송의 개리의 아들 강하오(4세) 군은 갑자기 촬영 중이던 VJ들에게 카메라를 꺼달라고 요청한다. 하오는 카메라가 모두 꺼진 것을 확인하고는 김범수의 보고싶다를 노래를 부른다. 

"상처만 주는 나를 왜 모르고 기다리...니!" 박자 천재인 하오가 갑자기 중간에 노래를 머뭇거리며 인상을 쓴다. 이내 안도하는 표정과 함께 다시 박자를 바로 잡는다. "상처만 주는 나를 왜 모르고 기다리니~♪"

하오는 기저귀에 큰 일을 본 것이다. 하오는 아직 화장실을 직접 가기는 힘들지만 큰 일을 보는 일이 촬영 당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임을 알고있다. 아직 어리지만 그의 기저귀는 강하오라는 인간 개인의 존엄이 깃든 곳이다. 


성인이 된 나는 기저귀보다는 화장실을 선호한다. 우리집은 부자가 아니기에 욕실과 겸용으로 쓰이는 화장실에서 목욕도 하고 손도 닦으며 도시인으로서 위생을 관리한다. 그 시간만큼은 나는 오롯이 개인으로서 그 시간과 공간을 향유하게 된다. 집단 문화를 참 좋아하는 한국인이 식사는 같이 하더라도 화장실만큼은 개인의 공간으로 놔둔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관계도 샤워까지는 같이 하더라도 변기의 점유만큼은 개인의 시간을 가급적 갖고자 하는 것을 보며, 화장실, 그 안에서도 특히 변기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 개인성만큼은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장실의 점유가 훼손되는 상황은 반드시 존재한다. 나의 온전한 일상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순간들 말이다. 휴전 상태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것이 전쟁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살아 생전 전쟁 시 민간인일 것이나 위험을 극도로 몰고 간다면 포로 정도가 될 것 같다. 국제법으로 전쟁 포로에게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적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하지만 그 존엄성에는 내 화장실이 포함되어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한 소설의 장면에는 전쟁 포로들이 이송 트럭 안에서 그대로 배뇨를 배설한다. 타인의 배뇨 장면을 그대로 목격할 수밖에 없고, 그의 목격을 온전히 수치스럽게 견뎌내야 하는 그 사람도 모두 전쟁에서는 도망갈 곳이 없다. 그 트럭 안에는 여러 사람의 뒤섞인 배뇨 냄새가 지독할 것이다. 비단 전쟁이 아닐지라도 아프리카 노예들의 이송선에는 겨우 누울 자리만 있었다고 하니 마찬가지로 개인의 화장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대대적인 전쟁이나 특수 상황이 아니더라도 인간 개인의 신체적 무능력화는 또 다른 전쟁이 된다. 의도치 않은 사고나 노화로 인하여 제대로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의 자율적인 화장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만 인간일 뿐 그의 존엄으로서 최후의 사생활은 훼손받는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무능력화가 타인에 의한 전쟁의 상황보다 어쩌면 더 외로운 슬픔이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다행히도 대다수의 주권 국가들은 시민의 존엄, 다시 말해 그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나 사회가 보호를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국가로부터는 시민들의 안보 보장을 위해서 어느 곳에선가 훈련을 받고 복무를 하는 군인들이 있다. 그리고 최근 COVID-19의 상황 속에서 영웅이 된 의료 서비스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집이 아닌 외부의 공간에서 청결한 삶을 관리하는 청소 노동자가 있다. 이밖에도 어느 곳이든 나의 안전한 화장실을 위해 노력해주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화장실은 안녕할까. 요즘 가장 고생하는 직군인 의료인을 예로 든다면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 2년차 간호사 K씨는 3교대 근무로 식사와 배변이 불규칙해 방광염과 변비를 번갈아 앓는다고 한다. 화장실 이상으로 군인은 이미 최저시급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력으로 징용되고, 청소 노동자는 대표적인 비정규직 직군으로 대한민국 최고 사립대학에서도 그들의 휴게 공간은 절대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아직 전쟁 중이다. 결국 나의 평화적 안락함은 어떤 이의 삶에 대해 왜곡된 평가 위에 누워 있다. 


인간이라면 먹고, 자고, 싸고, 건물주나 인공지능이 아닌 이상 노동한다. 계속 상기해야 한다. 나의 당연한 편안함을 제공한 그들의 노동은 안녕할지. 나는 언제까지 그들의 시간과 공간을 저만치 비가시적으로 두고 누워있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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