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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Aug 16. 2022

무작정 떠난 부산 당일치기 여행

모든 게 다 있다는 부산에서의 하루

아침 일찍부터 부산으로 향하는 SRT 열차를 타기 위해 집에서 끌려 나왔다. 온몸이 피곤에 절여진 상태라 열차를 타는 시간 거의 대부분을 잠만 잤다.


엄마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잔다고 핀잔을 주셨다. 나는 내 입은 구조상 일부러 힘을 주지 않는 한 잘 닫히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예전에 교정을 했는데도 구강구조에 문제가 있는 걸지 아랫입술을 의도적으로 올리지 않으면 입이 온전히 닫히지를 않는다. 그러니 몸에 힘이 풀리면 입이 저절로 벌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잘 때 입이 벌어지는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고 크게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 외에도 낮 시간에 누워있는 것, 물건을 제자리에 제대로 놓지 않기 등 내게 문제 삼는 것이 너무 많은데, 정작 나는 크게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라 반기를 들고 싶어진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을 보면 내 남자친구들이 다 달아나겠다고 하셨다. 나는 애초에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이 별로라는 이유로 헤어질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사귀지 않아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 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 무지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결코 그 사람 앞에서 잠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가족이 아닌 사람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잠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추한 꼴을 보일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겠지만, 가슴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어서 좀처럼 잠이 오지도 않을 듯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만큼 좋아할 사람이 과연 생기게 될지... 그건 확신이 없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일지 몰라도 당장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내 모습이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SRT를 내려서는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의 구수한 사투리가 우리가 부산에 왔음을 깨우쳐주는 듯했다. 그는 부산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만 같으신 분이셨다. 그는 부산에는 모든 게 다 있다고 하셨다. "김무성이 가지고 있는 관측대"인가 뭔가에 대해서도 한참 설명해주셨고, "세상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가도 부산에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라는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부터 갔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당시 내 표현에 따르자면 그 음식은 중국 음식 같은 거였는데, 막 짜장면 짬뽕은 아닌- 밥이랑 고기 종류인가 그랬다. 그리고 바나나 디저트가 @#%(비속어) 맛있었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날 갔던 식당은 P.F Chang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후로 택시를 또 탔나 해서 동백꽃이 피어 있는 장소에 갔다. 해운대쪽을 여행하는 중이었으니 아마도 해운대 동백섬이었을 것이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더라도 그렇다.

엄마는 길을 따라 잔뜩 핀 동백꽃들을 보고 그 진위여부(?)를 의심했다. 혹시 관광객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가짜 꽃 같은 걸 심어둔 것이 아닐지 음모론을 진지하게 제기하셔서 웃겼다. 겨울날에도 환하게 핀 동백꽃들은 거의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신기하게 예쁜 풍경이었다.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볼 때쯤에 우리는 모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가 부산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대학과 같은 미래의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러 온 것이라재차 강조하시기는 했다. 그렇게 대학 얘기를 하시면서 대충 내가 망했다는 류의 얘기를 하셨는데, 그런 말을 듣는 내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기만 할 수는 없었다. 재수 같이 계획에도 없는 얘기가 오갔는데 마냥 기분 좋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을 리가. 한편으로 그런 와중에도 아빠는 사진을 열심히 찍으려고 하셨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내게 자꾸 웃으라고 하셨는데, 나는 별로 웃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런 아버지의 노력이 살짝 성가시게도 느껴졌다.

아버지가 찍어주신 듯한 나와 엄마의 사진

해운대에서는 갈매기들을 보았다. 엄마가 갈매기들은 새우깡이 주식이 아니냐는 의문을 진지하게 얘기하셔서 나를 웃겼다. 아빠가 걔네는 당연히 물고기를 먹지, 어떻게 새우깡이 주식이겠냐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갈매기들한테 과자를 던져주셨다. 그랬더니 어디서 그렇게들 몰려오는 건지 갈매기들이 아주 막 난리를 치며 퍼덕퍼덕 날아와댔다.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날아오는 장면이 신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져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카페에 와서 관망 좋은 자리 주변에 앉아 있다가, 명당자리가 났을 때 놓치지 않고 부산 오션 뷰를 즐겼다. 내 대학과 진로를 비롯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이지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뭣도 없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썩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내 앞에는 광야만큼이나 마냥 무한해 보이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그걸로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싶었다. 긴 대화 끝에는 대학 진학을 하기 전까지 한국사랑 제2외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 등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온 결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그걸 공부한들 뭐가 크게 달라지려나 싶었다.


다시 SRT를 타고 오는 길에는 부모님이 주무시는 동안 나는 집에서 가져온 <Quiet>라는 책을 내내 읽었다. 책을 빨리 읽으라고 엄마가 닦달하셔서 압박을 받았다. 책 자체는 우리 사회에 저평가되어 왔을지 모르는 내향성의 힘을 재조명하는 유익한 내용이었지만... 300 페이지 넘는 원서 책의 분량은 아무래도 길게만 느껴졌다. 어쩐지 끝이 안 보이는 듯한 책을 완독 하기 위해서 집에 오는 길에 열차에서는 잠들지 않고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밤쯤에 다시 집에 오면서 부산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부산으로의 여행이 금방 끝나버리고 나서는 폐인 같이 일상을 지냈다. 지나고 보면 웃으며 넘길 수 있을만한 시간들이겠지만, 당장에는 내 인생이 다 망한 것처럼느껴졌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충고를 주셨다. 인생은 대학만으로 모든 게 다 끝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는 별로 실패한 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엄마도 내게 외교관의 진로를 얘기하시며 방향성을 제안해주셨다.


한편, 그 무렵에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P.T를 받아보기 위해 신청을 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운동과 다이어트라는 내 인생에 오래 미루어둔 숙제를 해결하기에 적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운동 선생님은 이전에 내 동생을 가르치셔서 일면식은 있던 분이셨다. 내 동생하고 있을 때 종종 봤었는데, 동생한테 인사할 때는 뭔가 웃는 상이셨고 되게 덩치가 큰 느낌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내 동생은 그 선생님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조만간 그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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