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에 ‘오타쿠(otaku, 御宅)'라는 단어가 있다. ‘특정 취미에만 강한 사람’, ‘특정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나 어쩐지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 등으로 부정적으로 표현되다가, 최근에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나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몰입하며 가지는 기질이나 행동 양식'으로 표현되어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고 한다. 지난 여름 서울 노원구 북서울 미술관에서 <덕후 프로젝트 : 몰입하다>라는 덕후들의, 덕후들에 의한, 덕후들을 위한 전시가 열렸다.
<덕후 프로젝트 : 몰입하다>에서는 작가 11명의 개인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덕후’이다. 덕질 하는 분야도 다양하고 특이해서 핸드폰 액세서리 덕후, 식물 덕후, 스타워즈 덕후에서 초자연현상 덕후까지 포진해 있다.
갑자기 생뚱맞게 왜 덕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이 포스팅을 시작한 것도 나만의 ‘덕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발레를 잘하지는 않는다. 다만 좋아한다. 덕질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KBS<명견만리> 제작진이 「명견만리 정치, 생애, 직업, 탐구 편」을 출간했다. "3부- 직업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역시 ‘덕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답 사회의 한계, 덕후들이 바꾼다”라는 제목이다.
수학은 못하지만 복잡한 컴퓨터 게임은 잘 만든다.
종이비행기만 2만 번 접다 이색 스포츠 회사를 차린다.
헬리콥터를 너무 좋아하다 드론을 만든다.
정해진 일자리를 위해 정답대로 살던 시대가 우리를 배신하고 있는 지금, 정답대로 살지 않는 이들이 개척하는 자기만의 길을 보라.
「명견만리 정치, 생애, 직업, 탐구 편(KBS<명견만리>제작진)」 중에서
저자는 우리 시대 덕후들에게 좋아하는 것으로 새로운 길,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보자고 말한다. 나 역시 저자가 바라보는 대한민국 현실에 관한 고찰에는 동감한다. 고등학생도 공무원을 꿈꾸는 대한민국에서는 오늘 저녁에도 젊은 청춘들이 컵밥으로 저녁을 때운다.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거대한 조직 속에 나사처럼 끼어들어 어릴 적 꿈과는 사뭇 다른 역할들을 담당하기도 한다.
다만 저자가 이러한 현실에서 제시하는 대안 내지 방향은 찬성하기 힘든 점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몰입한 후 그로써 직업을 개척하고 또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의미의 ‘덕질’이 되기 힘들 것이다. ‘덕질’이란 좋아서 하는 것인데, 덕질이 일이 되고 의무가 되면 예전처럼 그 것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꼭 필요하지만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내가 길을 몰라 한창 방황하던 시절, 다니던 학교에 좋아하는 공지영 작가가 강연을 왔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이왕 졸업할 것이면 빨리 졸업하고 고민이 된다면 일단 돈부터 벌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돈을 벌어가면서 고민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자신을 생활하고 유리된 그런 공간에 두면 꿈조차도 붕붕 뜬다. 아무 생각 없이 빨리 졸업하고 빨리 돈 벌고 살기 시작하면 어느 날 삶이 얘, 이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었잖아 하고 말을 걸 것이다.
그때는 다시 시작해도 된다.
<출처: 2008년 봄 ‘공지영 작가 찾아가는 한겨레 특강'에서 공지영 작가의 강연 내용 메모>
좋아하는 일이든 좋아하지 않는 일이든 업(業)이 되는 일은 숭고하다. 그것은 나와 내 가족들에게 소중한 식사를 주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사랑을 나누게끔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다 같이 직업을 만드는 덕질이 아닌,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으로의 덕질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나는 딱히 좋아하는 것이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 해도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질문을 던진다면 반드시 무언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실거라 믿는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물건 종류가 되었든, 풍경이나 음식이 되었든 장소가 되었든 종류는 상관없다. 다만 돈을 벌고 의무를 다해야만 내일을 살 수 있는 퍽퍽한 시간 속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일상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면 조금 더 버틸 만한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