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이 지나고 얼마 후였다. 그때도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터라 학교 학보사에 지원해서 면접을 보러 갔었다. 자기소개하는 란 취미에 무심코 '무용하기'라고 적어 냈는데, 그게 특이했었나 보다.
오, 취미가 무용이시라고요? 그럼 한번 보여주실래요? 사회에 나와서 보게 되는 면접 자리들에 비하면 심각한 자리는 아니었다만 그래도 낯설고 어려운 자리. 내가 여기 이 자리에서 왜 무용을 보여주기 어려운지에 대해 안드로메다로 빠져드는 설명을 하다가... (결국 학보사는 떨어졌다)
당황했던 것은,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취미로 배우는 무언가를 해보라고 강요해서도 아니요, 하기 싫은 것을 하라고 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유는 하나, 뭘 보여줘야 하는지 잘 몰랐다. 무용 학원에 드문 드문 등록해서 다닌다고 해도 난 그냥 취미생일뿐, 수업시간에 따라 하는 것이 전부지 응용은 안된다. 순간 후회가 되었던 것이, 내 취미가 노래였더라면 한 곡조 뽑아볼까요, 하고 흥이 나게 노래를 불렀을 거고, 취미가 방송댄스였으면 노래 좀 읊어주시라 하고 멋들어지게 웨이브라도 넣어드렸을 텐데. 나한테 발레 한 꼭지...? 출 수 있는 역량은 없었던 것이다.
+발레 전공했다는 스테파니가 이런 걸 하긴하더라
황금어장-라디오스타 "스테파니의 우아한 발레시범"<네이버 TV>
발레가 장기자랑으로 보여주기에는 취약한 취미인 건 맞다. 같이 발레 배우자니까 보컬학원이나 다니겠다는 친구의 말이 “발레는 어디 가서 보여줄 수도 없잖아”였으니. 물론 그것도 맞다. 그리고 어디 가서 취미로 발레 해요, 그러면 초면에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것 같고... 설명도 길어지는 것 같아서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는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말게 되었다(물론 지금은 취미 발레 하는 분들도 정말 많아졌지만요!).
내가 발레 하는 이유는 팔 할이 건강이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발레를 계속하는 이유는 건강 때문이다. 발레 수업에 가게 되면 싫든 좋든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게 되고, 윗몸 일으키기를 반강제(?)로 하게 된다. 도구가 필요한 운동도, 뭐 어려운 운동도 아니니 집에서도 하자 하자 해도 갖은 핑계로 안 하는 게 윗몸 일으키기 아니던가. 꼭 발레 학원에서 선생님이 시킬 때만 하게 된다.
발레는 성인이 되어 다시 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는 운동이다
발레 수업에서는 유리 인형처럼 낭창낭창 손짓만 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매트 운동으로 시작해서 바운동, 센터운동에 이르기까지 무지막지한 체력이 소모된다. 바에서 기본 순서만 나가도, 어깨 내리고 갈비뼈 잠그고 고관절을 턴 아웃해서 엉덩이에 힘을 꽉 주고 어깨를 눌러 팔꿈치, 손끝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정확하게 발레 자세로 만든 다음 (그렇다고 숨을 안 쉬면 알통 근육이 생기니 숨을 꼭 쉬어야 한대요) 연습을 하면, 한 20분만 순서를 나가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골반과 허벅지 안쪽의 쓰지 않는 근육들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바 워크만 충실하게 해도 근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 퐁뒤나 아다지오처럼 다리 근육을 쉬지 않고 쓰는 동작, 그랑 바뜨망처럼 크게 차는 동작 연습을 지나, 센터 연습 순서를 나간 후 수업이 끝날 때쯤 점프까지 뛰고 나면, 연습실 내는 전부 장거리 달리기를 완주한 선수들이 모인 것처럼 헉헉대는 소리가 가득하다(게다가 우리는 이미 나이가 많이 찬 성인이니까요...).
발레는 어렵거나 거리감 있는 춤이 아니다
굉장히 체계적이고 원칙과 법칙을 중시하는 춤이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방법대로 따라 하게 된다. 나는 전문 무용수들과는 체형도 다르고, 유연성이나 근력도 다르고, 물론 연습량에서 어마 무시한 차이가 나다 보니 내가 수업시간에 하는 동작이 사진 속 발레리나들처럼 예쁘기만 하진 않은데, 그렇기 때문에 발레를 예쁜 동작 때문에 한다면 금세 그만두고 말았을 거다. 무대 위 발레리나들처럼 손짓 하나에 감정을 실으려면 기본기가 우선 탄탄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이루는데 무던히 긴 세월과 시간들이 필요했을 것이니 말이다. 나는 선생님께서 가르쳐준 정석적이고 깔끔한 동작으로 신체를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아직 나한테는 그게 제일 어렵다.
발레학원에서 만난 취미발레생들 중에 인상적인 분이 있는데, 금발머리에 나이가 있으신 서양 중년 여성이셨다. 국적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러시아인이시라면 그분에게는 고전무용쯤 되는 발레를 배우시는 건데 한두해 배운 솜씨가 아니시라 더 멋있었다. 발레라는 춤은 단지 젊은 여성들만이 배울 수 있는 좁은 영역의 춤이 아니고 40대, 50대 혹은 60대가 넘어서도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나이 들고 싶은 생각이다.
내가 지적받아온 것들
발레 기본자세라고 배워오고, 지적받아왔던 이른바 “~ 세요” 시리즈.
어깨 내려서 펴세요, 목 빼지 말고 턱만 15도로 드세요, 뒤 날개뼈는 내리고 가슴 쪽 갈비뼈는 잠그세요, 골반을 빠지지 않게 세우고 엉덩이를 꽉 조아서 턴아웃 하세요, 그리고 정확하게 턴아웃 해서 발 끝~까지 포인하세요, 이걸 한꺼번에 동시에 생각하면서 해보세요...!(끄아아)
바 연습하다 보면 위에 나열한 것 중에 하나씩은 까먹고 골반이 빠진다거나 어깨가 올라간다거나 하는데, 그걸 하나하나 바로잡으려고 신경 쓰면서 자세를 연습해 나가는 것이 발레 수업이다. 발레 수업을 듣게 되면 스트레칭 시간과 바워크 때 자기 몸의 골반을 체크하며 몸을 움직이게 되는데, 골반을 바로 세우고 척추를 바르게 하기 때문에, 건강한 허리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발레는 좋은 운동인 듯하다.
집에서 발가락으로 휴지 주워올리는 연습하세요
발레에서 발은 기본적으로 발끝을 뾰족하게 포인(pointe) 하게 되는데, 데미-포인(발 아치만 바닥에 붙인 상태)에서 포인으로 거치면서 발바닥 전체를 써야 한다. 탄듀로 발을 포인해서 나가는 단순한 동작도 발바닥 전체를 써서 정확하게 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데... (사실 근데 또 하다 보면 대충 하게 되는...;) 그러려면 발바닥 근육도 발달(?) 시켜야 하고 발바닥을 예민하게 쓸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러기 위한 연습도 해보라는 말씀이시다.
처음으로 가는 발레 수업
요즘은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도 많고, 학원에 가보면 저분이 취미생인지 전공생인지 헷갈릴 만큼 잘하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언제들 그리 꾸준하게 하신 것인지...). 그렇지만 온전히 취미로, 건강을 위해, 그리고 즐거움을 위해 배우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발레 스트레칭을 위주로 하는 반이나 필라테스를 겸하는 반들도 많이 개설되어 있다.
발레 학원은 비싸지 않나요,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이리저리 계산해 보니 내가 요가를 등록하거나, 필라테스를 등록하거나, 혹은 수영, 헬스를 다니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수강료를 지불하고 있는 것 같다. 수업에 처음 들어갈 때는 아래 발레리나가 입은 것과 같은 레오타드라는 수영복 모양 연습복을 입는데, 발레 타이즈를 먼저 신고, 그 위에 레오타드를 입는다. 성인들은 그냥은 민망하니까 반바지나 연습용 쉬폰 치마도 덧입는다. 사실 운동하는데 장비부터 갖출 필요 없지 않으냐 하면 만원 안팎으로 판매되는 천슈즈만 학원에서 구입해서 편한 복장으로 연습할 수 있다.
작품반 수업도 어렵지 않은 반은 초보도 쉽게 즐길 수 있다. 내가 다녔던 어떤 학원 작품반에서는 ‘흑조’를 두 달에 걸쳐 같이 추게끔 했는데, 흑조가 무슨 작품인가! 블랙스완 주인공 나탈리 포트만도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는 그런 엄청난 역할 아닌가! 그걸 내가 한다고?
...라고 생각했지만, 걱정일 뿐이었고 수업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32회전 훼떼같은 어려운 부분을 배우는 것은 물론 아니고, 흑조의 느낌을 살리고 안무를 쉽게 바꿔서 배웠기 때문에 무난하게 배울 수 있었다. 발레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발레빠 수강생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즐거운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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