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중미 니카라과에 좌파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라는 우익 반군조직에 몰래 무기를 살 자금을 건넸다. 그 돈은 미국의 적이었던 이란에서 흘러나왔다. 이란은 당시 미국을 등에 업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란 돈이 니카라과로 흘러간 경로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거간꾼이 있었다. 이란의 적인 이스라엘이 이란에 미국산 무기를 넘기고, 그 무기값을 니카라과 반군에 건넨 것이다.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구의 적이었을까. 1987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을 정치적 궁지로 몰고간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공식적인’ 우호관계나 적대관계 뒤편에 여러 선들이 얽히고설켰다. 국제관계에서 ‘완전한 친구’나 ‘완전한 적’은 없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도 관계가 달라지지만, 국가라는 것은 원래 일관되고 단일한 행위자가 아니다. 이란과 이스라엘과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27일 이란 핵과학자 모흐센 파흐리자데가 테헤란 근교에서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 조 바이든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란과의 핵합의를 복원하는 걸 막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늘 이란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로 1970년대까지 두 나라 관계는 좋았다. 이란은 터키에 이어 이슬람국가로서는 두번째로 이스라엘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나라였다. 특히 이란 파흘라비 왕정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다. 이스라엘 역시, 이슬람국가이지만 아랍국이 아닌 이란을 연대의 대상으로 봤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의 ‘6일 전쟁’ 때에도 이란은 이스라엘에 석유를 내줬다. 이 시절 이란은 이스라엘과 합작한 에일라트-아슈켈론 송유관을 통해 유럽으로 석유를 수출했다. 이스라엘 엘알항공 여객기가 텔아비브와 테헤란을 오갔다. 군사협력도 적잖았다. 1977~79년에는 두 나라가 함께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났다.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이란 혁명이 동·서 양쪽 진영을 모두 거부하고 이슬람이라는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미국과 소련 모두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고 설명한다. 친미 왕정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이란이슬람공화국은 미국에 등을 돌렸을뿐 아니라 이스라엘과도 단교했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합법성도 부정했다.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적’이라 규정했고 미국이라는 “큰 사탄” 옆의 “작은 사탄”이라 지칭했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1980년 미국의 지원 속에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하면서 8년 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이란을 은밀히 도왔다. 1981년 이스라엘은 ‘오페라 작전(바빌론 작전)’을 통해 이라크 오시라크의 원자로를 폭격했고 이란에 무기를 팔았다. 대전차무기 M40 무반동총, 탱크 부품과 항공기 엔진 등이 아르헨티나 항공기와 배를 통해 이란으로 실려갔다. 이스라엘은 1981~1983년 이란에 5억달러 어치의 무기를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기간 테헤란 북쪽의 비밀기지에 이스라엘 군사·기술자문관 100여명이 머물렀다는 얘기도 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2000년대에 총리가 된)은 이란과의 사이에 “작은 창문이라도 열어 놓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어난 것이 콘트라 스캔들이었다.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신세계 질서’를 천명하면서 걸프전을 일으킨다. 1980년대에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90년대가 되자 갑자기 ‘세계의 악당’으로 추락했다. 이라크는 걸프전 뒤 국토의 절반 가량이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였고 미국이 주도한 제재 속에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됐다. 이라크가 무력화됨으로써 중동 복판에 정치적 진공상태가 만들어졌고, 이란은 그 틈을 이용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반이스라엘 무장정치조직들을 주도하며 역내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란과 유지해오던 ‘차가운 평화’도 깨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하고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했지만 이란에 대해서는 이전보다 한층 공세적인 태도를 취했다. 199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스라엘 대사관 테러공격, 그리고 2년 뒤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어난 유대인 시설 폭탄테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이란의 반정부 조직 무자히딘할크(MeK·인민전사)를 지원하며 이란에서 암살과 테러공격에 관여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적대관계는 이렇게 대리전(proxy war)으로 옮겨갔다. 이란에서 1997~2005년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잠시 기대감이 일기도 했다. 하타미는 이란의 유대인들은 모두 종교적 소수집단으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고 이란 태생인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을 2005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 장례식에 만나 끌어안는 제스처를 보여줬다. 그러나 하타미 역시 이스라엘을 ‘불법 국가’ ‘기생충’이라 불렀다.
결정적으로 이란을 고립시킨 것은 ‘핵 의혹’이었다.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으로 망명한 무자히딘할크 출신 등 해외 반체제 인사들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2005년 취임한 이란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지도에서 이스라엘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발언했고, 홀로코스트를 부인했으며, 혁명수비대를 동원해 중동 곳곳에 팔을 뻗었다.
2010년대 초반 이스라엘은 마수드 알리모함마디 등 이란 핵과학자들을 잇달아 암살했다. 2010년 6월에는 스턱스넷이라는 바이러스가 이란 핵프로그램을 공격해 나탄즈 핵시설에 보관돼 있던 농축우라늄의 10%가 못쓰게 됐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 짓이라고 발표했다. 2011년에는 이란 이스파한의 핵 시설이 폭파됐다. 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 모사드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혁명수비대 장성 하산 모카담 등 17명이 숨졌다. 이듬해 2월 폭로된 위키리크스 문건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쿠르드 전투원들과 함께 이스파한 폭발공작에 관여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2013년 1월에는 이란 포르도의 핵시설에서 또다시 폭발이 일어났고, 이란 측은 모사드와 미 중앙정보국(CIA)을 의심했다.
미국이 고강도 제재를 하기는 했으나 이란의 핵 개발은 북한과는 달리 우라늄을 농축하는 단계였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란은 억압적이지만 시민사회가 존재하고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가능한 나라다. 오랜 제재로 피폐해진 이란은 2013년 다시 온건파 정권을 택했다. 2015년 국제사회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이라는 형태로 핵 사찰과 제재 해제를 맞바꾸는 합의를 했다. 하지만 그후 이란을 고립시키려는 이스라엘의 분투는 더욱 심해졌다.
이란 핵합의에 따른 이스라엘의 위기감을 이해하려면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축에 놓고 들여다봐야 한다. 걸프의 아랍 전제왕정들과 달리 혁명 이전 이란 파흘라비 왕조의 레자 샤와 그 아들 모함마드 레자는 계몽군주를 자처하며 서구화에 매진했다. 혹자는 그 시절의 이란과 이스라엘을 미국의 ‘두 마리 사냥개’에 비유하기도 한다. 둘 다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을 받쳐주는 나라들이었으며 특히 유라시아 복판의 대국인 이란은 핵심적인 존재였다.
이란이 그 틀을 깨고 ‘민중혁명’을 통해 반미 이슬람국가로 변해버리자 미국의 중동 체스판에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커졌다. 홀로코스트라는 원죄에 대한 서방의 죄의식, 유대국가에 느끼는 문화적 동질감, 미국 내 유대계의 로비 등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만일 이란이 중동의 거대한 친미국가로 남아있었다면 이스라엘이 지금처럼 미국에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콘트라 스캔들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은 미국이 대놓고 할 수 없는 행위들을 뒤에서 대신 해주는 존재였다.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의 친구에서 적으로 바뀐 이라크 사담 정권을 흔들기 위해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이란 이슬람정권에 반대하는 무자히딘할크를 돕는 것이 그런 일들의 일부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권이 냉전 때 아프리카에서 수행한 역할을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했던 것이다. 중동에서만이 아니었다. 중남미 우익 반군들에 흘러들어간 무기들 상당수가 이스라엘이라는 브로커를 거쳤고, 이스라엘 민간군사회사(PMC) 용병들이 곳곳에서 반미 세력을 전복시키는 데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공 백인정권에 핵무기를 전파한 것도 이스라엘이었다.
하지만 오슬로 평화협정 이후 이스라엘은 오히려 갈수록 우경화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도 전쟁범죄 수준으로 치달았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도덕적 리더십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요인이 됐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중동에서는 반미감정이 더욱 높아지고 극단세력이 준동했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이집트의 친미정권마저 무너졌다. 시리아는 내전에 휘말렸다. 그 사이에 이란은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동의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풀려면 이란을 국제적 논의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정상화하는 수밖에 없다. 버락 오바마 정부가 핵협상에 나선 것은 핵무기 확산을 막는다는 목적을 넘어, 지정학적 프레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 군사·재정 상당부분을 의존하는 나라다. 끊임없이 이란을 경계하는 ‘작은 개’ 이스라엘의 불안감은 이란의 적대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이란의 ‘복귀’ 자체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두 나라 사이에 풀리지 않은 문제는 더 있다. 1979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이 이란에 줘야 할 석유구매대금이 당시 돈으로 약 10억달러였다. 이란 왕조가 붕괴하자 이스라엘은 이 돈을 떼어먹었다. 이란은 유럽에서 채무지불 소송을 여러번 내 승소했으나 이스라엘은 경제제재를 빌미로 거부하고 있다. 2015년 5월에도 스위스 법원이 이스라엘의 에일라트아슈켈론 송유사에 “이란에 11억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이스라엘 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