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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 Mar 05. 2021

미얀마, 되풀이되는 독재와 저항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이후 유혈사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선거부정이 벌어졌다며 군부가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켰죠. 정부 고문으로 사실상 국가 지도자였던 아웅산 수지 여사는 감금됐고요.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계엄통치에 들어갔으나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Protesters in Mandalay react to a crackdown on March 3. (The Irrawaddy)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시위대의 소식들이 올라오고는 있지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도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4일 발표한 성명에서 최소 54명이 숨졌다며 군부에 "살인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유엔 인권사무소가 확인한 수치일 뿐이고 실제로는 사망자가 더 많을 수 있다고 합니다. 3일 하루에만 38명이 군부의 총탄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달 28일에도 20명 가까이 숨졌다고 하네요. 


유엔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1700명 이상이 구금됐으며, 언론인도 30명 가까이 체포됐습니다. 일부는 끌려가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고 시위대 몇몇은 이미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은 그래도 계속 거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4일에도 최대 도시 양곤과 제2도시 만달레이 등에 시민들이 집결했습니다. 수백 명에서 1000명 규모의 시위대가 도심에 바리케이드를 세웠습니다. 수도 네피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군부 정권이 과거 양곤에서 내륙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세운 도시인 네피도는 인구가 적고 조용한 ‘미스터리한 수도’로 유명하지요. 이번에는 거기서도 시위가 이어지는군요. 


Angel has become the tragic face of the bloodshed. | Reuters

 

19세 소녀의 죽음이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치알 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여성은 3일 만달레이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했다가 숨졌습니다. 시민들이 그를 '에인절'이라고 부른다네요. 그가 입고 있던 까만색 티셔츠에는 하얀 글씨로 '다 잘 될거야(Everything will be OK)'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 문구와 사진이 소셜미디어로 퍼지고, 에인절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상징이 됐습니다. 댄서이고, 태권도를 배우는 소녀이기도 했던 그의 생전 페이스북 모습, 지난해 11월 생애 첫 투표를 하고 나서 찍은 사진 등이 퍼졌습니다. 


시위에 나가기 전에 에인절은 페이스북에 혈액형과 비상 연락처, 그리고 '시신을 기증해달라'는 메시지까지 남겨놨다고 합니다. 4일 만달레이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시민들이 그를 애도하며 떠나보냈습니다.

  

미얀마는 1948년 영국 식민통치에서 독립했지요. 잘 알려진 대로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독립 영웅이고요. 하지만 독립 10년 뒤인 1958년 첫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기간을 군사독재정권이 지배했습니다. 특히 1962년 정권을 잡은 네윈 장군은 무려 26년간 장기집권했습니다. 시민 자유를 억누른 것은 물론이고 민족/종교집단 간 분열을 조장해, 지금도 계속되는 민족갈등을 구조화한 장본인입니다. 게다가 네윈이 만든 1974년 헌법은 오랜 세월 이 나라를 외부와 단절시켰죠. 명목상 '사회주의 경제프로그램'이라며 주요 기업과 자원을 국유화해서, 국가가 시민들의 몫을 갈취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소수민족들을 사실상 노예화하고 그들의 땅에서 자원을 빼앗고... 



시민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1988년의 '8888 항쟁'입니다. 영국에 머물던 아웅산 수지가 미얀마로 돌아와 당시 저항의 구심점이 됐습니다. 경제난과 식량부족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당시 군부는 무차별 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30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지는 시위대가 짓밟힌 뒤 민족민주동맹(NLD)이라는 정당을 만들었지만 1989년 투옥됐고 2010년 풀려날 때까지 21년을 가택연금 상태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8888 항쟁의 충격 속에 군사정권은 1989년 랑군을 양곤으로 바꿨지요. 2005년에는 수도를 정글 속 신도시 네피도로 옮겼고 버마라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2007년 ‘사프론 혁명’이라 불리는 민주화 시위가 다시 일어납니다.  


미얀마 인구 5700만명 중 90% 가까이가 불교도입니다. 사프란, 노란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군부는 이 시위도 짓밟았지만 저항을 언제까지나 억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박도 심했고요. 그래서 2008년 새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민간 정권으로의 이양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민간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군부 권력이 유지되도록 헌법에 집어넣은 것이죠. 현행 헌법이 당시 만들어진 이 헌법입니다. 



2011년에는 명목상 민간 과도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관료 출신으로 군부 밑에서 총리를 지낸 테인세인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민주화 과정이 지금 10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봐야겠지요. 2015년에 첫 다당제 자유선거가 치러졌고, 아웅산 수지의 NLD가 압승했습니다. 


하지만 탑마도(Tatmadaw)라 불리는 군부가 의회 의석의 25%를 자동으로 갖게끔 헌법에 규정돼 있습니다. 개헌을 하려면 75%가 넘는 의석이 필요하니, 개헌조차 불가능하게 막아버린 겁니다. 민선 정부의 권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던 거지요.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 학살이 민선 정부 시대에도 계속됐던 것은 아웅산 수지 정부의 명분과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만, 그 배경에 군부 눈치를 봐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나마도 지난해 11월 5년만에 다시 치러진 총선을 문제 삼아 다시 군부가 나선 것이고요.  

 

Anti-regime protesters in downtown Yangon in February. (The Irrawaddy)


지난 3일 40명 가까운 이들이 숨진 뒤 몇몇 미얀마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 유엔의 '보호책임'을 촉구하는 게시물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지 측 의원들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4일 긴급 서한을 보내 민선 정부를 되살리고 폭력을 끝내도록 유엔이 나서달라고 호소하며 안보리의 보호책임을 촉구했습니다.


보호책임(Resposibility to protect, R2P)은 억압적인 정권이 자국민을 상대로 집단학살이나 인종청소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독립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더라도 인권 보호 차원에서 국제사회가 강제 개입을 할 수 있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2005년 유엔에서 정식화됐지요. 지금부터 딱 10년 전인 2011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정권이 반정부세력을 상대로 사실상의 전쟁을 벌이자 유엔 안보리 승인을 얻어 나토가 무력 개입을 한 전례가 있습니다. 당시 보호책임 논리를 들어서 미국은 항공모함을 지중해에 보냈고, 나토군이 폭격을 해 카다피 정부를 축출했습니다.


하지만 한 국가 내부의 민주화 과정에 국제사회가 무력으로 개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강대국 잣대로 보호책임을 규정할 수 있으니까요. 2003년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내세운 명분도 '중동 민주화'였습니다. 리비아 개입 당시에는 러시아의 대통령이 푸틴이 아닌 메드베데프였기 때문에 무력 사용에 찬성했지만, 상임이사국들의 역학관계 같은 힘의 논리가 안보리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유엔은 미얀마 상황에 우려 성명만 내놓은 상태이고, 미얀마 군부는 그것에도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GDP 성장률. https://www.statista.com/


일단 국제사회는 경제제재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 같습니다. 유엔 미얀마 인권 특별조사관 토머스 앤드루스는 4일 보고서에서 안보리가 미얀마 군부에 무기 금수와 경제 제재를 부과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특히 군부의 돈줄인 석유와 가스기업 제재를 촉구했고,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군부 책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의 요청으로 안보리가 5일 비공식 회의를 하는데, 거기서 제재를 논의할 것 같습니다. 안보리와 별개로 미국 상무부는 4일 이미 미얀마 국방부, 내무부, 미얀마경제기업, 미얀마경제지주회사 등 4곳을 제재 대상에 올리며 금수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유럽연합(EU)도 같은 날 미얀마에 대한 모든 개발 협력 지원을 중단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미얀마의 경제 사정은 지금 좋지 않습니다. 언제 좋았던 적이 있었겠냐마는... 1970년대 네윈 시절부터 미얀마는 고립주의를 택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조금씩 개방에 나섰지만 국제사회의 제재가 발동되고 있었고요. 2011년 민주화 과정이 시작된 뒤에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으나 오랜 고립과 독재 속에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2011년 이후 2019년까지 연평균 7%가 넘는 성장을 해왔고 빈곤률도 2005년 48%에서 2017년 25%로 떨어지기는 했습니다. 외국 투자도 2010년 9억달러에서 2017년 40억달러로 급증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1인당 GDP가 구매력 기준 5100달러에 불과합니다. 코로나19로 작년 경제에 타격을 입은데다가 올해 쿠데타에 제재까지 더해지면 살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중국은 네윈 시절부터 미얀마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거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것도 시민들의 반발 요인 중 하나였고, 8888 항쟁 뒤 군부가 조금이나마 개방을 하면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여전히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미얀마의 석유와 가스가 중국으로 흘러가는 겁니다. 


미얀마는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밀고 있는 일대일로 계획의 중심 파트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남부 윈난과 미얀마 라카인 주를 잇는 '중국-미얀마 경제회랑'을 만들어서 인도양에 접근하는 통로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미얀마 군부가 지금 의지할 곳도 중국밖에 없어 보입니다. 안보리에서 중국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지켜봐야겠지요. (중국의 반인권적인 행태를 비난하긴 쉽지만 한국 기업도 미얀마 군부정권과 협력해 에너지 자원을 채굴했으니, 남탓할 일은 못 됩니다 ㅠㅠ)

 

경제제재는 과거에도 계속 했던 건데,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는 데에 효과가 있을까요. 

세계에 남아 있는 군부 독재정권은 사실 몇 안 됩니다. '세습' 독재정권은 시리아, 북한, 아프리카의 가봉 정도이고요. 선거 없이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은 2019년 독재자가 축출되고 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수단 정권, 지난해 8월 정권을 장악한 아프리카 서부 내륙 말리 쿠데타 세력, 그리고 지금의 미얀마 군부, 이렇게 셋 밖에 없는 것 같네요. 


현지 언론들은 미얀마 공무원 115명이 3일 성명을 내고 시민 불복종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합니다. 주로 국영매체 직원들인 듯하네요. 의료진 파업도 이어지고 있고요. 4일 이라와디 뉴스를 보니 경찰들 중에도 반정부 시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모쪼록 미얀마에 봄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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