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 감독 : 브라이언 싱어
빼빼 마른 몸. 그와 상반되는 각진 얼굴. 모가 난 얼굴과는 더 상반되는 허리춤. 그리고 그보다 더 웃음 짓게 만드는 기괴한 의상들. 20년 넘게 살면서 파격이란 파격을 한데 모은 뮤지션이 있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지금 내겐 그간의 파격이라 여겼던 모든 것들이 허망하다. 이 영화를 전후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만약 <보헤미안 랩소디>를 못 봤다면, 내 삶 저 어딘가에 자리했을 소중한 소켓 하나를 영영 비워둘 뻔한 셈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깨나 분분한 것으로 보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현재로 다시금 호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덕으로 가는 티켓을 하나 끊어줬다는 사실이다. 왕복이 아닌 편도로. 그것도 영구권으로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보헤미안 랩소디>는 충분히 성공한 영화가 아닐까. 다소의 왜곡이 보인다 할지라도.
퀸 음악을 CF의 테마곡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내가 봐도 확실히 알겠는 건 퀸이 굉장히 대중적인 음악들을 쏟아냈다는 점이다. 영화 역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그들의 면모를 비춘다. 세계 곳곳을 투어 했던 그들의 역사를 종잇장 넘기듯 스킵한 건 아쉬운 대목이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다행히도 이 같은 이양이 우리가 아는 익숙한 노래들과 함께 넘어가서 멜로디를 곱씹으며 그들을 겹쳐볼 수 있었다.
다만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잘 모르는 내게도 크게 와 닿지 않았던 부분은 프레디의 정체성 문제다. 방대한 역사를 압축하다 보니 이 같은 오류가 벌어지는 건 인지상정한 일이다. 다행히도 블루레이로 발매될 DVD판에선 추가 장면들이 수록될 것으로 보인다(프레미 머큐리 役의 라미 말렉의 인스타그램에 이를 암시하는 게시글이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봤을 때 <보헤미안 랩소디>의 방향은 명확하다. 프레디 머큐리를 조명하되 그들의 음악을 우선시할 것. 영화 말미의 ‘라이브 에이드’는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무대이자 실화였다. 말미를 향할수록 감정이 고조되고 소름이 차오르는 건 프레디 머큐리와 퀸과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서 큰 변곡점이었던 그날의 라이브가 분명한 피날레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라이브를 찾아봤다. 놀랍도록 유사하게 재현됐다는 걸 알게 됐다. 관객은 CG로 처리했지만 이질감이 없었고 중앙 무대나 관객과 동조했던 떼창의 선율까지 완벽에 가까울 만큼 훌륭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프레디의 의상 역시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아디다스의 복서 슈즈 헤라클레스까지. 나는 이 영화의 많은 공들 중 하나는 의상팀에게 있다고 본다.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한 라미 말렉의 발견은 그보다 더한 보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적으로는 은근 이질감이 많다. 프레디 머큐리는 뻐드렁니 이상으로 하관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 점에서 라미 말렉의 하관은 다소 부족해 보인다. 신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오히려 다른 멤버들이 외적으로 더 닮아있다. 하지만 라미 말렉은 외모를 염두해 교정기를 채운 것 이상으로 스스로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하기 위한 구속구를 찾아 소화해낸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막 팬이 된 초짜의 눈으로도 역에 대한 그의 고민과 내공이 절실히 느껴진다.
호쾌한 힘이 담긴 강단 있는 손사래를 기억한다. 폭발할 듯한 목 주변의 핏줄은 분명 프레디 머큐리의 것과 같았다. 관객과 동조하는 성대의 가락에도 그의 모습들이 절묘히 포개졌다. 여기에 영화에 한정된 이야기인지 또는 실제를 고증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이브 에이드 직전의 프레디와 가족 간의 담화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입체적인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요동치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20여 분간의 피날레는 관객에게 단순히 그들의 영화와 음악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경험을 선사했다. 다신 없을 그 날의 기억을. 30여 년 전의 외딴 구장 라이브 홀에서의 경험을 말이다.
혹자들은 이야기한다. 우리나라는 음악 영화에 대한 수요가 유난히도 짙다고. <라라랜드>, <위플래쉬>, <비긴 어게인>, <어거스트 러쉬> 등 유독 히트를 쳤던 이 영화들의 특징은 영화이기 이전에 음악이었다. 그러나 더 자세히는 살 냄새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고 누구나가 떠올릴 법한 광경이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도 다르지 않았다. 프레디 머큐리와 퀸이라는 레전드 뮤지션을 물망 했지만 그들의 삶 속 고민과 걱정거리들은 우리 모두와 별다를 것 없는 골칫덩이와 같았다. 다만 그들에겐 음악이 있었다면 우리에겐 음악이 없었거나 부족했다. 극장을 찾으면서 자꾸 이 같은 장르에 관심을 두게 되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찾기 위한 자연스런 선택이 아니었을까.
프레디 머큐리에게 가장 즐거웠던 순간 중 하나는 ‘I want to break free’를 만들고 뮤비를 찍을 때였다고 한다. 여장을 하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낄낄대는 재미도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서 은연의 속내를 비친 이 곡을 향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프레디는 죽음을 실감하는 순간에도 음악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은 그의 가장 거대한 정체성이었다. 그들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지만 정작 뜨거운 못자리는 없다. 이 같은 영화에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건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장르가 성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종의 끌림과 같은 거라 느낀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전설이 된 한 남자의 생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피어난 명곡들은 이 같은 시간의 넋두리다. 시간은 되감을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되감는다. 그 날의 시간을. 기억을. 가파르게 치솟는 전율은 단순히 명곡과 좋은 음악 그리고 레전드 밴드라는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좀 더 복잡하고 구슬픈 이야기들이 우리의 감정을 째고 비집고 들어온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어떻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영화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들이 우연찮게 찾아 이들과의 필연을 약속하는 가교와 같은 영화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