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uruvuru Feb 03. 2019

<그린북>, 책과 차의 상관관계

영화 <그린북> / 피터 패럴리

영화 <그린북>에 제시되는 ‘그린북’은 어느 여행자를 배려한 친절한 책자다. 하지만 이 책자의 친절함은 보통의 그것과는 다르다. 일반 책자라면 TO-GO 리스트가 빼곡하겠지만, 그린북엔 모종의 단계를 거친 리스트가 기술되어 있다. TO-OUT이다.

흑과 백이 공존하지 않던 시절, 공존해도 삐걱거리기만 했던 시절, <그린북>은 해묵은 옛날을 복기한다. 시놉시스만 봐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는 이 영화의 내용은 크게 예상 내 테두리다. 짐작가는데로 정직하게 나아간다.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그들과 같이.


돈 셜리(마허살라 알리)는 그 시대에 드물게 성공한 흑인이다. 음악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그는 신분의 패널티를 이겨내고 당당히 상류층의 지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지위가 보장하는 그의 위치와 신분이 깎아내리는 그의 격 때문이다. 그는 좀체 평형을 잡지 못하는 저울처럼 미묘하게 기울기를 반복한다.

그의 시중을 드는 파트너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평범한 백인이다. 셜리 박사에 비해 풍족한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신분이 찍어 내리는 지장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우월한 백인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다행히도 그에겐 백인이란 것만으로 주어지는 ‘격’에 대한 자격지심은 없다. 흑인인 돈 셜리의 수발을 들어야 함에도 그 어떤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셜리 박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아니다. 세상이 왈과왈부하는 그릇된 규정에 별 생각이 없을 뿐, 그 이상의 감정들은 그 역시 알 길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둘이 여행을 떠났다. 북에서 남으로. 차 한대와 책 한 권을 가지고. 당연히 여행은 순탈할 리 없다.


<그린북>은 여러모로 다양한 영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프랑스의 우정 영화 <언터쳐블>이 떠오른다. 차 안에서 투닥대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택시>다. 그리고 결과로나 녹색의 차가 움직이는 걸 겹처보면 국내 영화인 <택시운전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처럼 조금씩 겹쳐있는 요소들을 뜯어보면 <그린북>을 구성하는 큰 요소들이 보인다. 이해 충돌이 있는 두 사람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야기.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연출되지만 결국엔 봉합되는 무언가과 그 앞에서 기다리는 해피엔딩. 하지만 그 뻔한 내러티브에도 영화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되려 애틋한 인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그 이유를 ‘배려’라 생각한다. <그린북>엔 배려로 가득하다. 그 배려가 만드는 문제도 더러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조심스레 행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셜리 박사는 흑인인 자신의 입지로 인해 혹여 토니가 이해못할 상황에 노출되기를 꺼린다. 토니는 위선이 가득한 백인 커뮤니티에서 셜리가 상처받지 않게 끔 뒤에서 노력한다.


영화 속 그린북의 존재는 이러한 둘의 이해관계를 표출하는 매개다. 하지만 이 그린북이 극의 커다란 존재감을 갖지는 않아보인다. 오히려 이 영화는 책이 아닌 차에 의해 도움받는다. 책은 갈 수 있고 없고를 가르는 것에 그친다면, 차는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사이에 두고 둘의 간담을 졸인다. 그린북은 정적이고 차는 동적이다. 그린북은 주어진 상황이라면 차는 그들이 새롭게 그려나갈 수 있는 미래를 상징한다.

어쩌면 차의 색깔 역시 그린북과 같은 녹색인 것은 두 매개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색이 달랐다면 그린북이 상징하는 의미도 빈약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택시운전사>는 목적이 다른 두 사람이 떠나는 이야기였다. 그런 둘을 이어주게 만들었던 건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보편적인 감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린북> 역시 마찬가지다. 셜리 박사가 받는 부당한 대우에 토니도 덩달아 화를 낸다.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린북>이 둘의 관계에 있어 더 애틋하게 다가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확인이 끝난 서로에 대한 이해 덕이다.


인종 차별이 성행했던 1960년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극명히 나뉘던 건 일말의 배려의 유무였다. 사회가 규정하던 그릇된 규칙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선 보이지 않는 배려가 필요했다. 규정과 상식의 어딘가에서 감정적인 본보기가 절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셜리와 토니가 있던 곳은 북부다. 지금은 러스트벨트로 불리는 북부지만, 당시엔 최고로 발전된 지역이었다. 그에 반해 남부는 낙후된 산업과 더불어 흑인에의 차별이 더욱 심하던 곳이었다. 영화가 북에서 남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당연한 일이었다. 갈등이 기다리고 있고, 문제의식을 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욱 확실해진다. 이 영화의 노골적인 장치가 여정이고 길이고 자동차라는 점. 하지만 그린북의 의의가 다소 퇴색될지라도 엄연히 존재의의는 있다. 그것은 그린북이 토니의 주머니 속에서 점차 꼬깃해진다는 것이다. 본래라면 토니가 가져야 할 물건이 아니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린북을 갖게 되는 그는 이전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그린북을 소유한 백인, 그 자체로 1960년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이 영화가 그리는 장면들은 의미 깊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이 영화 속 그린북의 존재의의는 충분할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Hello Freddie, Hello Queeeeee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