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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y Feb 02. 2018

아테네움 뮤지엄

그리고 사소한 목적


“그냥 맘 편히 머리 식히고 새로운 경험 하는 게 여행이지.” 아테네움 뮤지엄에 들어서면서 물어봤다. 여행의 목적이 뭐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뭔가 부족해.. 더 구체적이면 좋겠는데..


여행의 목적이 뭐냐고 나에게 물어보면 나 역시 완전한 한 문장으로는 말 못 할 거 같다. 하지만 정확한 목적은 있다.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이면서 많이. 이렇게 하나하나 목적들을 나열하면서 여행이 더욱 견고해진다고 생각했고, 나만의 여행이 완성된다고 믿어왔다.




이번 여행의 아주 사소한 목적들


하루정돈 늦잠 자고 일어나 숙소에 있는 사우나 느긋하게 해보기

미술관 안에서 만큼은 각자 혼자만의 시간 보내기

숙소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카페에 가서 두어 시간 동안 라떼 마시기

핀란드 느낌이 물씬 나는 엽서 하나 사기

알바 알토의 손때가 묻은 사보이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먹기

시장에서 로컬 식재료 사다가 요리도 해보고, 그 음식에 보드카 밤새 마시며 수다 떨기

핀란드 보드카 수집용으로 몇 개 사오기

아카데미아 서점에서 오래오래 머물다 책도 몇 권 사기

아르텍에서 스툴이나 조명 사오기(둘 다 사면 좋겠다..)

밤에 맥주 한 병씩 들고 골목 산책하기, 아직 백야 시즌이니까.


The Wounded Angel, 1903


'아테네움 뮤지엄'은 핀란드의 국립 미술관으로 시각미술과 응용미술의 공존 자체로 매력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간 날은 알바 알토의 전시회도 함께 볼 수 있는 날이었다. 며칠째 알바 알토냐고 투덜 되는 여행친구를 곁에 두고, 못 들은 채 하며 미술관에 들어선 첫걸음에 유독 한 작품이 훤히 보였다. 천사의 힘없는 모습과 대비되는 검은 옷의 어두운 청년들의 그림. 사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생소했던 아테네움 뮤지엄 정보를 미리 찾아보다 이 작품, 부상당한 천사를 헬싱키에 가면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이리저리 먼저 찾아봤었다. 핀란드 출신 화가인 유고 짐베르크(Hugo Simberg)의 작품이라는 것도. 정말 많이 본 작품이지만 핀란드 작품일 줄이야. 핀란드 사람들이 핀란드의 대표 작품으로 꼽을 만큼 사랑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오마주들은 정말 많이 본거 같다. 유고 짐베르크 역시 핀란드의 대표적 상징주의 화가. 그래선지 작품 설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이 작품 역시 작품명 란에 검은 줄을 그어놨을 뿐 작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품을 통해 각자 보고자 하는
자신 내면의 것을 본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흰색이 유독 발색하는 천사와는 다르게 두 청년의 어두운 몸짓과 검은 표정이 눈에 더 들어왔다. 뭐가 두려운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그다음 컷이 궁금해지는 그림. 다시 못 볼 것 같은 아쉬움에 다른 어느 그림보다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또 다른 핀란드 화가와 그 화가의 좋은 그림을 발견하고 싶어 졌다. 이렇게 또 사소한 목적 하나가 더 추가되는 셈이다. 오슬로에 가고 싶었던 작은 목적 중 하나인 뭉크의 그림도 미술관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여느 유명한 미술관 못지않게 간간히 보이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핀란드의 작품들과 나름 어울리는 모습이 꽤 괜찮았다. 기회가 되면 이 미술관 작품들의 설명이 담겨있는 책자도 하나 사가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매번 미술관에 가면 정신이 팔려 나중에 볼 용도든 글에 쓸 용도든 사진들을 너무 엉망으로 급하게 담아내 속상했었는데 이번 역시 그랬구나 싶다. 사진 구도며 프레임들도 삐뚤빼뚤 한 모양이 맘에 드는 사진 하나 없어..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특히 보는 만큼 화면에 잘 안 담아져서 너무 속상했던 이 구역은 화가들의 self-portraits.

각자 특색 있는 화법대로 컬러감을 담아 본인을 그려낸 자화상들이다. 화가의 자화상 이라곤 고흐나 램브란트, 프리다 칼로 정도의 자화상이 익숙했었는데 모르는 화가들이 온 벽에 가득 찬 걸 보니 낯선 동시에 새로운 아이템을 발견이나 한 듯 반갑고 눈이 반짝였다. 이렇게 많은 자화상 이라니.. 생소한 핀란드 화가들이 많았다. 맘에 드는 얼굴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사진으로 담아보고 아는 얼굴 찾아보려 고개를 오르내리기 바빴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넋 놓고 보다가 여행친구를 다시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다양한 화법을 한벽에서 또 자화상으로 모아서 보니 화가의 성격이 전면에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현재의 셀피같이 생활 속의 하나의 표현이겠다 싶기도 하고. 대부분 우울하기도 슬프기도 한 표정들을 보면서 그림 그리는 순간의 감정과 표정이 담기기도 하겠지 하며 당시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많은 생각과 여운이 들던 차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자화상이 있었다.




Helene Schjerfbeck (헬레네 세르프벡) 1862~1946


핀란드 헬싱키 출신의 대표 여류화가고, 자화상으로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눈동자와 볼의 표현에서 디즈니가 생각난 건 이상한 걸까. 뭔지 모를 대단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투박한 붓터치 속에 세심함이 부끄럽게 숨어있는 거 같았다. 색채감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톤에 현대작가의 느낌이 물씬 났다. 내심 속으론 좋은 화가를 발견했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표현할 방법을 몰라 한참을 들여다만 보았다. 이 화가의 다른 그림도 궁금해졌다.



특히 많았던 인물화에서 보인 간결한 붓터치와 절제된 컬러감에 확 끌려 온 작품들을 다 찾아볼 정도였다.

그중 그녀의 자화상들을 시간순으로 찾아서 나열해봤다. 시간순으로 변화된 자화상들만 봐도 화풍이 많이 바뀌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만큼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려 계속 노력했다는 증거겠지. 당시 배경을 찾아보니 여류화가가 활동하기 힘들었던 환경임에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좋은 화가였고, 당대 유명한 휘슬러나 뭉크의 작품들과 많이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 멋진 내 집이 생기면, 침실이나 책방 한 벽에 헬레네의 수줍게도 볼빨간 저 초상화를 무심하게 걸고 싶다는 나름 큰 욕심이 들었다. 물론 복사본 이어도 구하기가 어렵겠지만.. 여행 마지막 날엔 아카데미아 서점에서 수줍게 바라보는 듯한 아련한 표정에 며칠 전의 설렘이 마구 솟아났던 좋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알바 알토의 특별 전시.

헬싱키 어느 곳에서나 마주하는 알바 알토. 난 여전히 반갑고 좋았지만 누구에겐 너무 지겨웠던 공간.


한 곳을 바라보는 커플과 칼더의 모빌까지도 어울리는 장소




아치형의 어마어마한 창 앞으로 총총총 달린 하얀 골든벨과 하늘을 보며,

'이런 공간에서 매일 아침을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란 생각이 문득.

주방 테이블 위에 달만한 골든벨 하나만 사가야지 했던 사소한 목적이 좀 더 큰 꿈으로 바뀌던 날이었다.


아테네움 뮤지엄 (Ateneum Art Museum)
http://www.ateneum.fi

전시 - 핀란드 미술 이야기/Story of Finnish Art 라는 주제로 2020년 12월 31일까지 전시 예정
휴무 - 매주 월요일 휴무
주소 - Kaivokatu 2, 00100 Helsinki, 핀란드

*더 자세한 정보는 구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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