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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쿠나 Apr 28. 2021

비록 '뼈기자'가 아닌 '순살기자'일지라도

원고 청탁이 불러온 희박한 기자뽕 영끌하기


“OOO씨는 지원자 중에 기자 직무적합도가 1등이네요?”

2017년 여름, 모 일간지 면접을 마치고 나가려는 내게 면접관이 불쑥 말을 건넸다.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직무적합도 검사 얘기에 어리바리하게 대답하고 나왔다. 그때는 기자를 시켜주기만 하면 ‘뼈기자(뼛속까지 기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비록 그 면접에선 아주 똑 떨어졌을지라도.

“친화력이 있어서 그런지 이 조는 역대급으로 긴장 안 하고 분위기가 좋네.”

2019년 겨울, 최종면접에서 ‘OOOO OO기 수습기자로 제 친화력과 끈기를 발휘해보고 싶다’며 자기소개를 한 후에 이런 말을 들었다. 긴 대기시간에 실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내 덕이었는진 알 수 없다. 그래도 괜히 기자로서의 내 역량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이 면접에선 다행히 합격했다.


‘뼈기자’ 꿈꿨지만 현실은 뼈 없는 순살

2019년 2월 25일, 입사 4일 차. 명함과 사원증, 노트북을 받은 설렘은 채 몇 시간도 가지 않았다. 사내 교육을 받는다고 나름대로 정장에 구두까지 갖췄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동작경찰서였다. 그리고 그날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 나는 이 직무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두 번째, 내 친화력은 사람 봐가면서 발휘됐다. 뼈기자는 무슨… 치킨에 빗대자면 뼈 없는 순살에 가까웠다.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담배를 피우는 의경들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명함을 건네는 정도였다. 유리벽 너머 형사당직은 뭐 그렇게 또 무섭던지. 그러다 결국 3일째 새벽에는 서울 관악구의 한 파출소 앞에서 더듬더듬 보고하다 ‘넌 그게 안 궁금해?’라는 선배의 말에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솔직히 정말로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난 안 궁금할까, 왜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까, 이래서 기자를 할 수는 있는 걸까…….


거지부터 대통령까지 만나는 직업

그 이후론 자아성찰을 할 틈도 없이 3개월의 수습기간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절대 평생 만날 수 없을 법한 사람들을 만났다. 성폭행 피해를 당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큰딸과 언니를 따라간 작은딸을 보내고 혼자 남아 시위를 하는 어머니, 군사독재정권을 피해 한국에 왔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차라리 감옥에 가둬달라는 이집트인, 성추행 가해자가 된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 약물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조모임을 하는 사람들…. 높으신 분들보다는 꾀죄죄한 차림의 내게 마음을 열고 당신들의 얘기를 들려준 분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수습이 끝나고 첫 출입처는 법원이었다. 입사 3개월이 지나 공식적인 수습은 끝났지만 6개월이 지나야 할 수 있는 비공식적 ‘탈수습’은 하지 못한 채로, 역시 정신을 차려보니 서초동이었다. 법원 출근 첫날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구속된 대법원장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첫 공판이 열렸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며 썼던 논술 속 주인공이 내 눈앞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뿐인가. 수습 기간 소위 ‘대박 사건’으로 여겨졌던 살인·강간·마약 사건은 법원 도처에 널려 있었다. 세상에 나쁜 놈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서초동에서 다시 경찰서로

법원 출입 8개월 동안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재판이 계속됐고, 지난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조국 사태’가 터졌다. 서초동에 언제 바람 잘 날이 있겠냐만은 입사 ‘n개월 차’인 새내기 기자에겐 버거운 나날이었다. 기소 전이라 법원으로 넘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으니 불안하고 괴로웠다. 비슷한 연차여도 다른 ‘뼈기자’들은 나처럼 헤매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쩌다 단독 기사를 쓰더라도, 포털 메인에 기사가 걸려도, 댓글이 수천개가 달려도 신나기보단 마음이 무거웠다.

법조도 분명 매력적인 출입처였지만, 늘 경찰팀에서만 쓰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아쉬웠다. 피고인석에 앉은 사람보단 법정에 없는 피해자의 사연이 더 궁금했고, 사건에 대한 법리적 판단보다는 진짜 사람들의 얘기가 듣고 싶었다. ‘난 기자 안 맞는 것 같아’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좀 더 현장에서 굴려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운 좋게도 올해부터는 다시 경찰팀으로 돌아왔다.


‘뼈기자’ 못지않은 ‘순살기자’로 크고 싶다

“인터뷰 안 하려고 했는데, 기자님 기사들 쭉 읽어보니 좋은 기사 많이 써주시는 것 같아서 하려구요.”

기획기사에 쓸 사례를 찾다가 온라인으로 여기저기 쪽지를 돌리다 겨우 구한 취재원에게 이런 답장을 받았을 때, 그렇게 알게 된 취재원이 내 생각이 났다며 또 다른 제보를 해올 때, 우연히 지인이 공유한 기사가 알고 보니 내가 쓴 기사였을 때, 기사가 나가고 나서 생긴 변화가 미약하게나마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그래도 이 직업을 선택하길 잘했다 싶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비록 취재원에게 전화 끊겠단 말을 못해 30분 동안 휴대전화에 매여 있고, 기사가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다 단독을 뺏겨 버리고, 여전히 취재원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해보고, 쉬는 날에는 뉴스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뼈기자’가 아닌 ‘순살기자’일지라도. 이런 내가 필요한 취재원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취재가, 내가 잘 쓸 수 있는 기사가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뼈기자’ 부럽지 않은 ‘순살기자’가 되고 싶다. 뼈 있는 치킨보다 순살 치킨이 2000원 비싼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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