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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쿠나 Oct 18. 2023

'공소권 없음' 다섯 글자의 무력감

2020년 7월 14일의 현장메모

“귀하의 강제추행 사건은 피의자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유죄, 무죄를 따질 수 없어 불기소(공소권 없음-재판 불가라는 뜻) 의견으로 ○○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될 예정입니다.”

자신을 성추행한 지인을 경찰에 고소했던 한 여성이 받은 문자 내용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강제추행 등 혐의로 고소한 A씨 역시 이런 문자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공소권 없음’. 이 다섯 글자가 주는 무력감을 또 한 번 느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 형법상 강제추행 혐의로 수사를 받아야 했을 박 시장은 지난 10일 숨진 채 발견됐다. A씨가 고소장을 접수하고 1차 진술조사를 마친 지 만 하루도 안 된 시점이다.

이 무력감은 낯설지 않다.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유료 회원, 학생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배우 조민기씨, 유튜버 양예원씨의 ‘스튜디오 강제촬영 사건’에 연루된 스튜디오 실장 정모씨가 사망했을 때도,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은 봉합됐고, 진실은 묻혔다. 오히려 피해자가 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가해자로 뒤바뀌어 2차 피해에 시달리기 일쑤다.

직원 상습 갑질·폭행으로 고소당한 마커그룹 송명빈 대표를 취재했을 때도 그랬다.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숨진 채 발견된 그의 자택을 다녀온 날, 공소권 없음의 무력감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날 취재수첩에 책임을 물을 사람이 사라졌기에 이 사건이 곧 잊힐 것이라고 적었다. 불온한 예언대로 그의 죽음 이후 사건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피해가 사라지진 않는다. A씨의 말처럼 피해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은 더불어민주당 윤준병 의원의 말처럼 ‘죽음으로 미투 처리의 전범(본보기)을 몸소 실천’ 한 것이 될 순 없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속 문장대로 ‘아주 최종적인 가해’일 뿐이다.

사법적 절차를 밟을 수 없다면 서울시의 진상 조사를 통해서라도 사건의 진실을 밝혀 국민의 무력감을 없애줘야 한다. ‘공소권 없음’이 가해자를 두둔하기 위한 방패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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