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평소와 같이 버스로 이동할 시간을 미리 계산하고 집을 나섰다.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가라뫼 사거리’에서 광화문까지 30분~40분쯤 걸린다. 명성운수가 운영하는 1000대 버스가 많아 정류장에서 5분 이상 기다리는 경우가 흔치 안다. 그래도 모르니까 10분 정도의 여유까지 뒀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안 온다. 10분 정도 지나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버스의 이동 경로를 표시하는 전광판을 올려다보는데 기다리는 번호들이 안 나온다. ‘뭐지?’ 그제야 정류장 벽에 붙어있는 안문이 눈에 들어왔다. ‘시내버스 파업 안내문.’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급히 꺼냈다. 버스를 포기하고 지하철역으로 갈지 판단이 안 선다. 운이 좋아 역에서 바로 지하철을 탄다고 해도 어림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팅 시간엔 지각이다. 놓으니 진정된다. 당황스러움이 초조함으로 그리고 짜증으로 넘어왔다. ‘도대체 왜 파업을 한 거야!’
2018년 6월 뉴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찬 적이 있다. 한 장애인이 지하철 리프트를 타려다 죽었다. 동영상을 보면 그는 리프트를 작동시키려는 듯 뭔가를 향해 손을 뻗어 아등바등하다가 뒤로 밀려던 휠체어와 함께 화면 아래쪽으로 계단으로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사건 이후 장애인 활동가들이 휠체어를 끌고 단체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20여 명의 장애인들은 서울 지하철 1호선에 올라타 매 역마다 내렸다, 탔다를 반복했다. 이들은 요구는 리프트 말고 안전한 승강기 설치하라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같은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10분 정도면 충분할 거리를 1시간이 걸렸다. 지하철에 있던 한 시민은 "시민들에게 적당히 피해를 줘야 이해를 하지“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기본권은 공공질서 유지라는 논리에 막히기 일쑤다. 불편을 당장 피부로 느끼는 다수 앞에 소수의 기본권은 맥을 못 춘다. 헌법에서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헌법이 기본권을 제한도 하고 있다. 헌법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버스 파업이나 과거 장애인 지하철 시위나 형식적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방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불편이 없었더라면 버스기사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장애인의 지하철 이동권에 대해 다수의 시민들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 일이 아니니까. 버스 파업을 처음 직면했던 가라뫼 사거리에서의 짜증은 어디를 향했던 걸까?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는 “차별의 부당함을 보기보다 차별의 부당함을 외치는 소수자의 흠을 찾고 비난한다. ~ 자신이 이미 소수자를 위해 혹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착각으로 차별을 경고하게 만들 수 있다”며 2016년 6월 세계사회복지대회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소개한다.
축사에 맞춰 기습 시위를 벌인 장애인 활동가들은 경호원들에게 들려 행사장 내쳐졌다. 행사에 참여한 해외 사회복지사들은 끌려 나간 장애인 활동가들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했느냐고 물었고, 장애인등급제 등 정부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인 입장을 알게 된다. 해외 사회복지사들의 요구로 세계사회복지대회 의장은 강제진압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그리고 장애인 활동가들은 폐막식에서 10분 동안 공식적인 발언 기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