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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Jun 26. 2021

내 머릿속 콩나물 대가리 같은 상념들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지금 찍은 4만원 방

어제, 오늘 호캉스를 하고 있어요. 돈지랄이라고 욕하셔도 돼요. 쥐뿔도 없는 놈이, 멀쩡한 방 놔두고 호텔로 놀러 온 거니까요. 참고로 여기는 방콕이고요. 방콕 내 방에서, 호텔로 점프했어요. 택시까지 타고 이 호텔, 저 호텔 기웃거리는 중이에요. 오늘만 산다는 생각으로 살아요. 오늘 쓸 돈만 있으면 된다까지는 아니고, 한 달 쓸 돈만 있으면 된다. 아슬아슬 똥줄 라이프로 근 이십 년을 살았어요. 한 달 생활비 기준은 백만 원이에요. 신기하게 은행 잔고는 백만 원 전후에서 쫀쫀하게 오르락, 내리락하는 중이고요. 아주 잘 살고 있다고, 생각날 때마다 저를 다독여 주고 있어요.  


오늘 체크인한 숙소는 강변 뷰를 자랑하지만, 시장 바닥 한가운데에 있는 특이한 호텔이기도 해요. 첫날 방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이 방을 보면서 깨달아요. 오해는 마세요. 4만 원 값어치는 충분히 하는 방이에요. 첫날은 방콕에 이런 곳도 있었어? 숨은 왕국 같은 호텔이었어요. 그런데 창문을 활짝 열 수 없어서 좀 답답하더라고요. 지금 이 방은 평범해요. 대신 창밖 풍경이 나름 괜찮아요. 1층 로비에서, 다른 방 사진들을 봐요. 아름답더라고요. 사진발일 수도 있지만, 오늘 이 호텔은 빈방 없이 다 팔렸어요. 외국인도 뚝 끊긴 마당에, 주말 풀부킹은 이례적인 거죠. 그러니 사진발 아닐 확률이 더 높아요. 저도 후기를 보고, 이 호텔에 온 거니까요. 제가 머무는 방만 독보적으로 싸요. 다른 방은 기본 십만 원이 넘더라고요. 다른 방에 묵는 사람들에게는 인생 숙소일 수도 있어요. 같은 호텔인데도요. 그들과 나의 밤은 전혀 달라요. 여행도 마찬가지죠. 같은 나라를 간다고, 숙소가 같나요? 만나는 사람이 같나요? 그런데도 우리는 싸워요. 자신의 경험만이 맞다고요. 이만한 바보 싸움이 없죠. 우리의 인식은 언어에 지배당해요. 묵는 호텔의 이름이 같으면, 경험도 같다. 이렇게밖에 인지를 못해요. 방구조도, 전망도 각기 다르지만 같은 호텔이라는 언어에 먼저 지배를 받아요. 내 인식이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음을 새삼 깨달아요. 그러니까 지금 저는 지혜의 방에 머물고 있는 셈이네요.


편의점에서 스니커즈랑 웨하스를 사요. 밤에 배고플까 봐요. 근 몇 년 배가 고픈 밤은 없었어요. 밤늦게 먹으면 위산이 역류하는 극강의 고통을 맛보게 돼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하죠. 알아서 기어야죠. 그렇게 야식 끊은 지도 1년이 넘어가요. 그런데 덥석 과자와 초콜릿을 사요. 밤에 배가 고플까 봐라뇨?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죠. 배고픔 때문에 낯선 방이 서러울까 봐 겁이 나요. 어젯밤에는 콜라를 다 마셨어요. 내 돈으로 콜라를 사 먹은 것도, 백만 년만이에요. 그것도 비싼 호텔 냉장고 콜라를요. 마시고 싶을 땐 마셔야죠. 방콕에서 방콕으로 온 것도 여행인가요? 이런 날은 좀 괜찮아. 허물어지라고 내 안의 내가 저를 꼬드겨요. 이런 날이 어떤 날인데요? 스니커즈가 이렇게 달았나요? 절반 먹고, 내려놔요. 젊을 땐 이게 왜 맛있었을까요? 달콤한 청춘이라 이건가요? 웬만한 건, 달게 느껴지지도 않는?


태국은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요. 한국도 확진자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왜 겁이 덜 날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마다 알코올로 손을 깨끗이 닦던 저는 어디 갔나요? 카페에서 커피 마실 땐 마스크를 잠깐 벗는데, 안 마실 때도 그냥 그러고 있어요. 옆에서는 수상한 젊은이들이 침을 튀겨가며 수다를 떠는데도요. 더 조심해야 하는 상황인데, 다들 지쳤나 봐요. 될 대로 돼라.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도 크죠.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태평한데, 나만 겁먹고 있는 건가? 백신도 맞지 않은 내 몸이, 뭘 믿고 이렇게 까불까요? 면역성이 그동안 월등하게 높아지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위험한데도 저는 왜 이리 태평할까요? 남들이 백신을 맞는 것도, 남들이 태평한 것도 내 면역성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휩쓸려 살면, 모든 감각은 무뎌져요. 다수의 감각에 의지하며, 그쪽으로 흘러가요. 백 명 중 아흔아홉 명이 짜다고 하면, 이미 그 음식이 짜요. 우리의 판단력은 딱 그 수준이에요. 나는 아닌데라고 부정하실 건가요?


어제는 구글맵만 믿고 가다가 길이 없는 거예요. 분명 삼십 미터만 더 가면 호텔인데요. 그런데 길이 없어요. 마침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계시더라고요. 길이 있다는 거예요. 공사 현장이 막고 있는데, 폭 삼십 센티 정도의 난간이 있어요. 그게 길이라는 거예요. 3미터 낭떠러지 밑으로는 강물이 흐르고요. 길이 그것뿐이면 가야죠. 그때 저의 믿음은 구글맵이었어요. 구글맵이 안 보이는 건너편 세상에, 호텔이 있다고 했어요. 믿어야죠. 내 머리 꼭대기 위성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구글신이 그렇다는데요. 그 믿음으로, 절벽(이라고 하기엔 3미터 정도지만)을 타고, 결국 호텔을 찾아냈어요. 구글신을 믿었더니, 보여주더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의 존재를 이젠 믿어야 할 때가 됐나 봐요. 구글신은 진짜 신이 아닐까요? 구글맵이 없던 시대의 여행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겉핥기 여행이었어요. 조금만 들어가면 풍경 맛집, 현지인 맛집이 바글바글하지만 눈에 안 뜨인다는 이유로 지나쳐 버렸어요. 그런 허접한 여행을 해놓고, 좋네, 안 좋네. 침을 튀겨가며 평가질에 몰두했어요. 그 어떤 평가도 어리석다. 이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해요. 지금 좋다. 지금 아름답다. 지금 행복하다. 지금 맛있다. 그건 딱 지금만 유효한 믿음이에요. 내일도 좋을 것이고, 모레도 아름다울 것이고, 한 달 후도 행복할 것이며, 일 년 후에도 맛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으면 하세요. 동창회에서 친구들 보면서, 왜 이렇게 늙었니? 그렇게 놀라는 자신이 가장 늙었다는 것도 모른 채, 놀라워만 하는 바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아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았으면 해요. 결과와 상관없이 늘 기대하면서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피해만 가지 않는다면, 마음껏 멍청하고, 천진하게 살고 싶어요. 노래를 못한다고 해서, 노래를 하지 않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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