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우 Jan 03. 2024

커밍아웃하고 벌어진 일

저는 오십 대 게이입니다 

(대만 퀴어 영화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추천)


커밍아웃은 인생 계획상 예순 즈음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기력이 쇠하시면 나도 한결 자유로울 수 있겠지. 몇 주 전부터 갑자기 아버지 기억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생은 너무도 짧고, 또렷한 인지 능력의 시간은 더 짧다는 걸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인 채로 죽고 싶다. 이성애자로 오독된 채 죽고 싶지 않다. 2023년이 지나기 전에, 에라 모르겠다. 당신들은 관심 없겠지만,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라오. 브런치에, 네이버 블로그에, SNS에 평생 박제될 커밍아웃을 줄줄이 써 내려갔다. 일종의 쾌감도 있었는데, 이런 순간을 평생 두려워했으면서, 내가 그 두려움으로 성큼, 주도적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짜릿했다. 두려움 속으로 들어오니, 두려움의 중심은 되려 고요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민우야, 괜찮니? 이모는 너를 응원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아르헨티나에 사는 형)

-나는 그냥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어(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


친구 와이프가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깜짝 놀라서는, 자기는 알았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고 한다. 내가 가장 먼저 커밍아웃을 한 녀석이다. 꼬치꼬치 물을 아내가 좀 부담스럽더라나? 이 친구를 기점으로 한 명씩, 나의 정체를 밝히게 되는데 아무래도 여자 쪽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뒤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전혀 상관없다. 내 귀에만 안 들리면, 없는 일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꽤나 마음 편한 인간이 됐다. 자랑이다. 


-다시 태어났으니 투썸 플레이스 스초생 기프티콘 보내라. 


커밍아웃 글에 농담을 좀 섞었을 뿐인데, 열 개의 스초생 케이크가 생겼다. 스초생은 스트로베리, 초콜릿, 생크림을 뜻한다. 투썸플레이스는 나한테 뭐라도 좀 줘라. 꽤나 광고가 되지 않았나?


-작가님 새로 태어나셨으니 반지를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손가락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이런 메일을 받았다. 커밍아웃 후에 조롱과 악플을 각오했다. 그런데 반지라니? 진심으로 축하를 받다니? 뭉클했다. 그동안 과도한 공포를 떠안고 살았구나. 커밍아웃 후기를 쓰는 이유? 꽁꽁 숨어 사는 수많은 게이 친구들에게 작은 용기이고 싶다. 커밍아웃을 하란 얘기가 아니다. 그건 알아서 할 일. 본의 아니게 탄로가 났다고, 죽을 것처럼 절망하진 말라는 얘기다.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


나도 게이지만, 이런 놀라움이나 혐오에 답을 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그런 존재가 아니길 강렬히 희망하며 사춘기를 보냈다. 죽고 싶단 생각이 사춘기를 지배했다. 보통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을 원한다. 절대다수가 선택한 삶이 안전하고, 유익해 보인다.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서 너무나 두렵고, 외로웠다. 신분제의 가장 밑바닥이 게이인 건 아닐까? 그런 한탄도 많이 했다. 들키지만 않으면 평민은 된다. 들키면 그때부턴 천민이다. 노예 계급이다. 길을 걸으면 모두가 눈빛으로 침을 뱉는 상상을 했다. 끔찍했다.  


세상이 변했다. 여전히 부정적인 사람도 많지만, 모두에게 환영받는 건 꼭 게이가 아니더라도 불가능하다. 애완동물이 사람 이상으로 중요해졌듯이, 모든 생명은 생명 자체로 소중하다. MZ 세대에게 게이는, 딱히 이상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을 것이다. MZ 세대가 아니더라도, 절대다수는 그래서 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다. 연예인이 아니라면, 주변에서 잠시 화제가 되고 끝이다. 정체가 밝혀지면, 뜻밖의 자유가 선물로 주어진다. 나는 여자가 불편했다. 왜냐면 남자로서 여자를 대하는 특유희 호기심 눈빛이 불가능해서다. 괜히 미안하고, 게이인 게 탄로 나는 것 같고 그랬다. 지금 나는 할 말 못 할 말 마음껏 나눌 수 있는 여자 사람 친구가 폭증했다. 약자라고 생각했던 사람, 말 못 할 비밀로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먼저 다가오더라. 내가 나의 패를 까면, 그들도 자신의 패를 깐다. 이겨야 하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고, 감싸주는 축제가 된다. 요즘 매일 축제로 산다. 상상도 못 한 해피엔딩이다. 앞으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 줄 알고? 안 좋은 일은, 안 좋을 때만 생각하면 된다. 좋은 일을 마음껏 즐기면, 그게 잘 사는 거. 예전엔 경박한 인간이고 싶지 않았다. 이젠 한없이 가볍고만 싶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이게 대단한 재주이자 능력이란 것도 알았다. 함부로 좋아하고, 솔직하게 싫어하겠다. 생은 짧으니, 더 솔직한 나로 살다 가겠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이럴 줄 몰랐다. 이렇게나 좋을 줄 몰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오십에 커밍아웃합니다. 저는 게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