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된다는 것
아빠가 본인이 번 돈을 차나 번듯한 집을 사는 것에 투자하기보다는 먼 훗날 자신이 먼저 죽고 나서의 가족의 평안을 위한 사망 보험금을 들이붓고 있다는 것을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 말을 처음 듣고 나서 드는 첫 생각은 솔직히, '그럼 얼른 죽던가' 따위의 생각이었다. 나에게 현재 눈에 보이는 이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미래에 오게 될 큰돈 따위가 아니라 당장 오늘의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그러면 나는 아빠로부터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아빠가 죽고 나서 그 돈으로 나의 평온하고 다소 횡재에 가까운 돈들을 펑펑 써재끼는 것뿐이란 말인가?
왈칵 눈물이 났다. 밥 한 끼 따뜻하게 먹었냐고 질문할 줄도 모르던 투박한 사랑방식을 고집하던 그가 본인만의 최선의 희생 방식으로 사랑한다니, 느껴지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던 사랑의 또 다른 실체를 느껴서 마음이 녹았던 걸까. 사랑은 뭘까, 받아들이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사랑은 사랑인 걸까. 그것은 단지 방식의 차이라고 단순한 결론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왜 눈물은 나고 왜 마음이 아프지.
엄마는 삼수 수능 전날 새벽까지 잠이 오질 않아 자포자기한 마음에 책상에서 엎드려 밤을 지새우는 딸내미에게 따뜻한 물을 받아와서는 족욕을 시켜주었다. 족욕을 하면 잠이 잘 오지 않을까 하며 새벽 3시에 마주한 진심. 여자가 무슨 삼수냐며 나이 운운하며 나의 삼수에 대한 반대와 지지를 동시에 보여주었던 사람. 그래서 더 그날의 족욕 물이 따스하고 애틋했나. 그날의 3시간의 단잠은 인생 30년간 잤던 모든 수면 중 가장 개운했다. 언젠가, 사랑은 하는데 그 방법들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날것의 사랑을 베푸는 것에 대해 본인도 답답하고 안타깝다며 눈가를 적시며 말하던 모습에, 나는 사실은 사랑을 가득 채운 것 같기도..
한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게끔 견뎌내는 인내심을 배우는 것이 부모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정말이지, 아직 멀었다. 나는 나를 불효녀라는 틀 안에 가두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했다. 나는 아빠의 언제나 화가 나있고 날이 서있는 모습을 혐오했으며 엄마의 늘 희생으로 포장된 잘못된 헌신에 진절머리나 했다. 한 명은 늘 화가 나고 한 명은 늘 슬프고 참는 관계. 그것이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관계의 첫 모습이기에 나는 늘 한편에 불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처음 마주한 관계가 왜 하필 저따위냐며 폄하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왜 저러고 살까? 저렇게 서로를 지겨워하면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지겨워도 혐오해도 그것마저도 포용하는 것이 부부인 것이라면 그건 철부지인 나는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지 않을까 싶기도... 이해와 혐오를 반복하는 요즘 내 감정을 오롯이 느끼며 지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정말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향하는 (그것도 부모) 사랑을 의심해야 한단 말인가. 아 의심조차도 나의 감정이므로 의심을 의심하지 않기로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