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노노 Apr 22. 2024

이방인으로서의 나

런던 2일 차 - 2024년 1월 9일

서울에서 열 한시에 출발해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게 현지시간 오후 다섯 시였으니, 열다섯 시간은 비행기 안에 있었나 보다. 시차 적응을 수월하게 할 요량으로 그 긴 시간 동안 잠을 안 잤다. 거진 서른 시간을 깨어 있었다. 온몸은 피곤하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정신력으로 무장했다. 30kg에 육박하는 짐을 지고 시내로 이동하는 건 멀쩡한 상태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길에서 무조건 귓속으로 흘려 넣던 음악도 거두고 한껏 긴장한 채로 숙소를 향해 직진하는 내가 대견하다. 두어 번 환승하는 동안 마주한 계단 앞에서 캐리어를 들고 끙끙대는 나를 도와준 뭇 남성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오늘은 앓아누웠을 테다. 문득 몇 주 전 싱가포르 출장이 떠오른다. 싱가포르에 입국하면서부터 출국할 때까지 전용 차량으로 모든 에스코트를 받았던 게 꿈만 같다. 호강 단지 취급받은 출장 덕택에 spoiled 된 마음가짐이 런던에 와 비로소 겸손해진다.


잠자리가 바뀐 걸 알아서인지. 초 각성 상태로 돌입한 것인지. 식사는커녕 겨우 씻고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음에도 생체시계는 아직 서울에 맞춰져 있다. 새벽 두 시인데 반짝 눈이 떠졌다. 서울은 오전 열한 시다. 차분히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써도 깜깜한 새벽이라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노곤한 시간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침 일곱 시라니.


오후 네 시면 해가 지고, 아침 여덟 시는 되어야 해가 뜨는 영국의 겨울. 십 년 전 영국에 올 땐 일부러 개중에 가장 좋은 날을 골랐다. 5월부터 10월까지 있었으니 추운 날은 쏙 빼놓고 아름다운 날씨만 경험한 셈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다시 오고 싶었던 건 온전한 사계절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일 거다. 잘 정돈된 예쁜 면만 겪고는 전부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제2의 고향 영국을, 완연히 알고 싶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왕복 항공편과 숙소 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여행이다. 서울에선 아무런 일정이 없으면 털 끝 하나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데, 런던까지 와선 절대 그럴 수 없다. 가장 보고 싶었던 광경을 보러 웨스트민스터로 향했다. 처음 런던에 왔을 땐 웨스트민스터와 마주하는 템스 강 건너편 Vanxhall에 묵으며 숙소에서 빅벤을 바라보았었는데, 하는 추억에 잠긴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시작해 트라팔가 광장, 내셔널 갤러리, 피카딜리 서커스를 지나 소호까지 쭉 걸었다. 걷다가 너무 추워서 트라팔가 광장 앞 Waterstone 서점에 들어가 몸을 녹이는 여유도 부린다. 여행에선 서점과 마트를 꼭 방문하는 편이다. 역시, 에릭 칼의 나라답게 그의 서가가 별도로 준비되어 있다. The Very Hungry Caterpillar는 정말 사랑하는 그림책. 싱가포르 출장 중 들른 서점에서 발견하고 한 권 사 왔었는데, 그때 사길 잘했다. 짐을 더 늘릴 수가 없어...@.@


리버티 백화점을 한 바퀴 돌고 나와 근처에 보이는 펍에서 주문한 런던의 첫 끼는 피시 앤 칩스와 기네스. 점심시간인데 생체시계는 저녁을 보내고 있으니 저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펍에서 마시는 기네스 생맥주가 그렇게 그리웠었다. 한국에서 아무리 기네스 생맥주를 찾아 마셔도 절대 이 맛이 아니더라고. 맥주 두 모금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확 올라오며 눈이 절로 감긴다. 진짜 피곤하긴 한가 봐. 후딱 먹고 숙소로 돌아와 낮잠도 밤잠도 아닌 잠을 한참 잤다. 이 피곤하고 졸린 위기를 버텨야 시차 적응에 성공할 수 있다. 내일은 낮잠 자지 않기로 약속.


첫 끼를 피시 앤 칩스와 기네스로 주문한 나는 누가 보아도 관광객이었겠지. 로컬 사람인 양 자신 있게 횡단보도를 건너고(횡단보도 빨간불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무조건 관광객이다) 꺅꺅대며 사진을 찍진 않았음에도 미어캣처럼 두리번대는 나는 어쩔 수 없는 관광객처럼 보였겠지. 첫 주는 호텔에 묵고, 이후엔 에어비앤비로 옮길 예정이다. 호텔에 있으므로 정의되는 이방인의 아우라를 있는 힘껏 즐기기로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외지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미숙한 즐거움이 익숙한 안정으로 변할 때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울로 가야 하겠지.


15시간 꼼짝없이 앉아있기, 30kg 짐 들고 계단 오르내리기, 2만 보 걷기까지 하니 온몸이 쑤신다. 손목과 허리가 아파오고(데드리프트 하다가 허리 삐끗했을 때 아프던 그 위치다) 어깨가 결린다. 통증은 자신을 굳이 낯설게 하는 훈장이라 생각하니 꽤 즐겁다. 런던의 첫 하루가 저물어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from ICN to LHR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