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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Apr 24. 2024

시차와 고군분투

런던 3일 차 - 2024년 1월 10일

온전한 런던에서의 시간은 고작 어제 하루였는데, 짧디 짧은 낮 시간을 잠으로 채웠다는 게 못내 아쉽다. 두 번 다시 햇살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집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자도, 눈을 뜨면 여전히 새벽이다. 한 시였다가, 두 시였다가 한다. 도라버려.. 잠이 달아난 김에 오랜만에 깊은 호흡을 들이쉬는 명상을 하다 선잠에 빠졌다. 희한한 꿈을 꿨다. 친한 친구가 나를 보러 2박 3일의 일정으로 런던에 왔는데 친구를 배웅하며 강변을 걸어가다가 물에 된통 빠지는 그런 꿈. 꿈속에선 강물이 목까지 잠겨 매우 당황했지만 태연히 물 밖으로 걸어 나왔는데, 눈을 뜨자마자 꿈이라는 걸 알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급히 해몽을 찾아본다. 밖으로 잘 나오면 길몽이라니! 휴가 기간 동안 무탈히 잘 지낼 수 있다는 뜻인가 보아.


기묘한 꿈속을 벗어나니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만하면 충분히 애썼다. 원래 다짐은 런던 시내를 누비는 조깅이었지만 이방인은 아직 이곳이 얼만큼 안전한지 미처 파악을 못 했다. 8시나 되어서야 일출이 시작하는 이곳의 다섯 시는 아직 빼곡한 밤이다. 그래서 호텔 짐(gym)으로 향한다. 한참 운동을 하면서 오늘은 뭘 해야 만족스러울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수놓았다. 나는 무엇에 흐뭇함을 느끼는가. 아직 잘 형용이 안 되는구먼. 그렇다면 무작정 나가는 것 외에 딱히 뾰족한 수는 없다. 나가지 않고 쉬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우스키핑 서비스를 받으려면.. 일정 시간 꼭 부재해야 한다.


관광객스럽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이번 주는 어쩔 수 없지 뭐. 런던에 왔으면 빅벤과 타워브릿지는 국룰이지. 그렇게 타워브릿지를 보러 갈 요량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나는 방향감각이 좋은 편이다. 덕분에 이제 구글맵 없이도 지하철역까지 갈 수 있지롱! 그러다 갑자기 노팅힐을 가 볼까? 하는 충동으로 플랫폼 앞에 멈춰 섰다. 왼쪽은 노팅힐, 오른쪽은 타워브릿지로 향하는 열차다. 운명에 맡겨 먼저 오는 걸 타기로 했다. 결과는? 타워브릿지 승!


영국 지하철엔 종이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는 사람을 서울에서보다 잦은 빈도로 볼 수 있다. 이 나라의 오래된 지하철 안에선 휴대폰 데이터가 자주 안 터지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지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런던의 지하철이 개통된 해는 1863년이라니 1차 세계대전보다도 50년 전이다...! 그 가운데서 나도 자신 있게 책을 꺼내었다. 이들의 일상에 익숙하게 스며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이었을까나. 책장을 얼마나 넘겼을까, 저들은 알아볼 수 없는 꼬부랑글씨로 쓰여있는 소설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은밀하고 퍽 흐뭇하다. 늬들 이거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나만 알지. 일상 속 이들과 다름없는 아무개가 되기 위해 흉내 내면서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함에 방점을 찍고 있는 모순을 발견한다. 평범하면서도 다르고 싶은 건 대체 무슨 심보야?


타워브릿지를 건너 템스 강 남쪽으로 내려갔다. 런던브릿지까지 걸어가 가로질러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기로 마음먹고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런던브릿지에 다다르자 버로우 마켓이 근방에 보인다. 괜히 마켓을 한 바퀴 돌고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별 말 안 했는데 캐셔는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한국어로 건네는 감사 인사에 나도 모르게 반가움이 앞서는 걸 보니, 언어를 매개하여 같은 범주로 묶이는 건 든든한 일이다.


런던브릿지를 건너 표표하게 걷다 보니 BANK 역이다. 여긴 여의도 같은 곳인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구만. 오래된 건물이 많아 비로소 유럽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난다.


길 가다 발견한 Daunt Books 서점에도 들렀다. 소설 코너에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어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 엄마가 사랑하는 존 그리샴의 밀리언 셀러도 있다. 사실 북백을 구입할 요량이었는데, 천천히 사기로 한다. 더 많은 짐을 들고 숙소를 옮길 엄두가 안 나는 탓이다.


그나마 익숙한 소호로 넘어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Black Pudding Scotch Egg와 기네스 생맥주. 최근 회식 이외에 술 마시는 일은 없었는데, 그토록 사랑하는 기네스를 즐길 수 있을 때 양껏 마시기로 한다. 이 또한 그리워질 것을 알기에. 그렇게 많이 걷고 간단히 한 끼를 채웠는데 부족함 없이 충만하다. 서울에선 대체 얼마나 먹었던 거야...?


고작 이틀임에도 ‘오늘 뭐 하지’를 고민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목표와 성취에 도취된 일상을 벗어나 무목적의 삶을 보내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동안 나는 정확한 목표만 보며 살아왔구나. 그래서 지향점 없는 하루가 힘에 부치는구나.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은 이런 것일까. 나이가 드는 게 두려웠던 건 표적이 부재함에서 기인하는 수도 있겠다.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혼자 있어도 함께 있어도 튼튼한 사람. 자신을 대표하는 사회적 정의에서 벗어나 그저 ‘나’라는 본질로 실존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값지다. 나를 둘러싼 한 겹을 벗겨내고서야 그 중심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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