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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Apr 29. 2024

인연을 소중히

런던 5일 차 - 2024년 1월 12일

시간이 참 빠르다. 월요일에 도착했는데, 벌써 금요일이라니. 런던에서 맞는 첫 번째 주말인 오늘은 체크아웃을 하고 먼 길 떠나는 날. 어학연수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다니엘을 만나러 북쪽으로 간다.


28인치 캐리어에 꽉꽉 눌러 담아왔다가 일부 풀었던 짐을 다시 싸려는데 올 때처럼 정리가 안 돼서 당황했다. 와서 늘어난 짐은 하나도 없는데 왜 가방이 안 잠기는 걸까. 원래 체크아웃 시간은 12시인데,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양해를 구하고 약간 늦게 나왔다. 이제 당분간 없을 반신욕과 트레드밀 달리기 등등.. 오전 시간은 호텔에서만 할 수 있는 일로 꽉 채우기.


저 큰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릴 생각 하니 눈앞이 깜깜했는데, 킹스크로스 역은 이동하는 인파가 많은 만큼 엘리베이터가 잘 되어 있어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며칠 만에 짐을 드니 계속 뻐근하던 허리 위치가 아파온다. 너무 방심했구나. 자세 잘 잡고 들었어야 했어..


항공권을 발권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니엘에게 나의 영국행을 알리는 거였다. 다니엘은 고맙게도 자신의 집에 게스트룸이 있다며 내게 언제든 환영이라는 답을 주었다. 십 년간 우리를 이어주는 건 SNS를 통한 간헐적인 연락뿐이었음에도 아직까지 서로를 환영할 수 있는 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사실 2020년 1월에 약 보름간의 일정으로 런던에 갈 계획을 세워뒀었다. 친구들과 방콕에서 찐한 3박 4일을 보낸 뒤에 런던에 와서 다니엘도 만나고 그토록 그리던 영국을 즐기다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방콕에 다녀오자마자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펜데믹으로 번지면서 온 나라의 국경이 닫혔다. 방콕에 무사히 다녀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연히 영국행은 무산되었다. 휴가를 취소해야 하는 상황보다도 오랜만에 재회할 친구와의 만남이 스러졌다는 게 더욱 속상했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니엘이 있는 더럼으로 간다. 더럼은 에든버러와 기차로 두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북쪽에 위치한다. 밀라노 출신인 다니엘이 더럼에 오게 된 건 더럼 대학교 Durham University 의 정교수직을 갖게 되어서라고 했다.


다니엘은 심성이 곱고 차분하다. 지금으로 설명하면 극 I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유럽여행을 떠날 예정인데 밀라노에 가면 만날 수 있는지 물었더니 단박에 Of course,라고 해 주었었다. 심지어 다니엘 어머니 댁에서 2박이나 신세를 졌다. 오레키에테Orecchiette 파스타는 사람 귀 모양으로 생겨서 이탈리안으로 ‘작은 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리얼 이탈리안 라자냐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진짜 이탈리안 가정식을 대접해 주셨을 만큼 애틋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다.


영국의 많은 식당은 12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딱히 허기지지 않았을뿐더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해서 오늘의 점심은 따뜻한 라테 한 잔으로 대신했다.


해리 포터는 내 또래 친구들만의 추억인 줄 알았는데 그의 인기는 아직 건재하다. 예전에도 이렇게 줄이 길었었나. 아쉽지만 나는 킹스크로스 역 2번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차를 탄다. 괜히 호그와트 가얄 것 같고 설레는구먼.


자리마다 어디까지 가는지 표기되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더라고. 그래도 한 세 시간 기차 안에 있어야 했기에,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에어팟을 꺼내 들었다. <솔로 지옥 2>의 정주행을 영국행 비행기에서 전부 마쳤기 때문에 이번엔 시즌 3을 시작했다. 다 좋은데... 금요일에 <환승 연애 3>을 못 봐서 너무 답답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티빙은 해외에서 서비스가 안 된다 흑흑)


오랜만에 만난 다니엘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보다 나의 퇴화한 영어 스피킹 실력이 너무 걱정되었다. 설렘과 우려를 안고 도착한 더럼. 역까지 마중 나온 다니엘을 보니 반가움이 앞서 찐한 포옹을 나누었다. 엉터리 문법으로 말하는 게 대수랴.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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