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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노노 May 02. 2024

더럼Durham의 이모저모

런던 6일 차 - 2024년 1월 13일

친구와 오랜만에 재회했다고 늦은 시간까지 수다 떠는 바람에 초저녁에 쏟아지는 졸음을 참게 되어 그런지,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평소 수면 루틴을 찾았다. 저녁 열 시에 잠들어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 기적 같은 하루. 자다가 번뜩 눈을 떴는데 휴대폰에 숫자 5가 보일 때의 기쁨이란.. 요 며칠 아무리 열심히 자도 눈을 뜨면 새벽 한 시라 어찌나 좌절했었는지. 잠 못 이루던 어느 새벽 서울에 있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승무원 생활을 하며 두바이에 있던 친구의 옛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사 가슴 깊이 공감한다는 사죄의 마음을 전했다. 역지사지만큼 효과적인 반추는 없고 양질의 수면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차(tea)에 진심인 영국에 오래도록 살고 있다 해도 아침엔 무조건 커피를 마셔야 하는 다니엘과 눈 뜨면 커피부터 찾는 나. 이탈리안과 코리안은 여러모로 많이 닮아 있다며 웃음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 유독 날씨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다니엘에게 내게는 햇살을 데리고 다니는 초능력이 있다는 비밀을 일러주었다. 근데 이건 정말이다. 날씨 요정은 햇님을 더럼까지 데리고 왔지롱.


오늘의 일정은 더럼 시내를 둘러보는 것. 벌써 더럼에 거주한 지 삼 년 차인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더럼은 오로지 더럼 대학교만을 위한 도시라고 한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 영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더럼 대학교, 로컬 사람들보다는 전 세계에서 온 대학생들이 훨씬 많은 곳.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은 도시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학기 중엔 북적거린다는 이곳.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새해 연휴를 품은 짧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개강하는 첫 주라 일이 엄청 많은데, 어제 오후 나 픽업 오느라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게 있다고 잠깐 사무실에 들르자고 해서 가게 된 다니엘의 오피스. 전형적인 교수님 사무실이었지만 내 친구 방이라고 하니까 또 색다르다. 다 좋아 보인다. 멋지다 다니엘~~~~!


그러고는 열심히 시내 구경. 더럼 성과 성당을 둘러싸고 동그랗게 강이 흐르고 그를 따라 자연이 드리워져 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와 가까워 그런지 날씨와 분위기는 에든버러와 비슷하고, 시내 규모와 주택가 이미지는 예전 어학연수 시절 지내던 엑시터와 많이 닮아 있다.


드디어 먹었다 영국에서 먹는 찐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물론 아침은 아니고 점심이었지만. 점심시간에 아침 메뉴 먹는 나 어떤데..!


더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공원이 있다고 해서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오.. 이게 영국 날씨지. 역시 구름이 많고 흐리군.. 하는 탄식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는데 옆에서 다니엘이 ‘와 오늘 날씨 좋다!’ 하는 감탄을 내뱉는다. 더럼에서 오늘 같은 날씨를 써니 하다고 부른다고. 빼곡한 구름들 속 작은 틈새로 비추는 햇살을 가리킨다. 날씨가 좋아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밖에 나왔다는 이야기까지. 어쩐지 시내, 식당, 강변, 산책로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빼곡하더라니. 역시 모든 건 상대적이다. 아무렴 세상이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면 흐리다는 정의를 내렸더라도 이 동네 기준에 이만큼이 맑은 하늘이라면 맑은 거다. 누가 뭐라고 정의한들 내 기준에 부합한다면 그건 맞는 일이다.


다니엘이 추천한 런던 포그를 마시기 위해 찾아간 식당. 런던 포그London Fog라니, 런던의 안개를 형상화한 건가. 얼그레이 홍차를 우려낸 후에 바닐라 향 시럽 조금, 따끈하게 데운 우유와 쫀쫀하게 만든 우유 거품을 듬뿍 올린 이 음료는  스타벅스 얼그레이 티 라테 같은 익숙한 맛이 난다. 한국에 돌아가서 영국이 그리울 때 먹을 메뉴 적립이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귀가했다. 음식 솜씨가 없어 십 년 전 마마처럼 맛있는 저녁을 대접할 순 없지만 미식에 기준이 높은 이탈리안답게 전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엄선된 재료로만 만들었다고 강조한 저녁 식사. 소박해서 오히려 좋았다.


밀라노에서부터 더럼까지, 마냥 받기만 한 게 너무 미안해서 다니엘에게 기회가 되면 서울에 꼭 오라고 했다. 거창하진 않아도 내가 사랑하는 서울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겠다고. 다니엘이 내게 그랬듯 그가 서울에 온다는 소식에 주저하지 않고 ‘우리 집에 초대할게!’할 수 있는 적당한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다. 막역하게 지낼 수 있는 인종, 언어, 문화, 성별, 나이까지 전부 다른 친구가 있다는 건 아주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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